그리스 신화와 채식주의자의 영혜
어느 칼럼니스트의 기고문을 읽다가 문득 ‘나무로의 변신’ 이야기를 떠올렸고, 그 안에서 각 주인공의 변신을 추동하는 동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래 글은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소박한 작법 학습 기록이다.
(1) 신화: 아폴론의 교만과 에로스의 복수, 그로 인해 고통받던 다프네의 월계수로의 변신 이야기
(2) 소설: 채식주의자에서의 영혜가 서서히 나무로 변해가는 이야기
여성들의 ‘나무로의 변신’ 서사 전달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것을 차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학습해 보고자 한다.
이야기 하나, [그리스 신화]
태양의 신 아폴론이 길을 걷고 있을 때, 사랑의 신 에로스가 화살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를 본 아폴론은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가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놀다니, 어울리지 않는구나.”
하지만 에로스는 단순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신이든 인간이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였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은 에로스는 분노하여 아폴론을 향해 황금 화살을 쏘았다. 이 화살을 맞으면 누구든 처음 본 사람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때, 아폴론 앞을 요정 다프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프네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이었다. 아폴론은 화살을 맞는 순간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곧장 사랑을 고백하려 다가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납 화살이 날아와 다프네의 가슴에 꽂혔다. 황금 화살과 달리, 납 화살은 처음 본 사람을 무조건 미워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다프네는 아폴론을 본능적으로 미워하게 된 것이다.
아폴론은 끊임없이 다프네를 뒤쫓으며 간청했다.
“제발 내 사랑을 받아 주오!”
그러나 아폴론이 다가갈수록 다프네는 더욱 멀리 달아났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애타는 심정으로 달렸고, 다프네는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하지만 그 도망치는 모습조차 아폴론의 눈에는 매혹적으로 보였다. 흩날리는 머리칼조차 그를 유혹하는 듯 느껴졌다. 그는 도저히 다프네를 품에 안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 바짝 뒤쫓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귓가에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 다프네는 더 이상 힘을 다하지 못해 절망 속에서 아버지에게 외쳤다.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폴론의 손에 잡히기 싫어요! 제 모습을 바꿔 주세요!"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다프네의 몸은 굳어가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초록 잎이 돋아나고, 두 팔은 나뭇가지로 변했다. 가슴은 부드러운 나무껍질에 덮였으며, 머리칼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바뀌었다. 하얀 두 다리는 뿌리가 되어 대지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다프네는 결국 한 그루 월계수 나무로 변해버린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슬프게 흔들렸다.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를 사랑한 아폴론은 그녀의 잎사귀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이때부터 월계수는 아폴론의 상징이 되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에서 승리한 이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월계관은 승리와 명예, 그리고 영광의 상징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초판 표지 그림은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다. 나무는 같은 수종으로 보이지만, 줄기와 가지는 물론 잎에 덮인 전체 모양도 제각각이다. 햇빛과 수분의 영향이 크고, 눈과 바람도 수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여기에 서 있는 위치와 순서에 따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사람도 나무도 고유형은 유전되지만, 그림의 배경처럼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표지 그림으로 실레 작품을 고른 이는 한강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자신을 가린 잎사귀를 거의 떨구고 정직하게 세상과 만나는 나무는 누구일까? 채식으로 '나무 되기'를 꿈꾸던 주인공 영혜일까? 한강 자신일까? 아니면 에곤 실레일까? _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2024년 인용
이야기 둘,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평생 고기를 즐겨 먹었다. 영혜는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당하면서 자랐다. 결혼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영혜를 정형화된 역할로 대했다. 브래지어를 불편해하는 영혜의 숨 막힘을 살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혜의 과민함을 의아해했다. 어느 날 영혜는 꿈을 통해 동물을 타자화하고 육식으로 폭력을 행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폭력은 영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 안에 내면화된 폭력은 자신의 책임이었고, 스스로 버려야 했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한다. 그 종점인 '나무 되기'는 우리에게는 비극이지만, 영혜에게는 각성의 완성이다.
그리고,
아폴론과 다프네 신화와 한강의 『채식주의자』 비교
신화적 도피에서 현대적 전복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인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나무로의 변신' 모티프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전복되는지를 살펴본다.
『채식주의자』가 고전적 변형 모티프의 전통을 차용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전제를 전복시켜 현대 사회의 폭력, 가부장적 억압, 그리고 도덕적으로 타협된 세상에서 윤리적 존재를 탐색하는 심오하고 다층적인 비평으로 발전시켰다.
다프네의 변신은 초자연적이고 즉각적인 물리적 도피 행위로 그려지지만, 결국 그녀를 쫓던 아폴론에 의해 그의 영광과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으로 전유되고 제도화되어 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혜의 변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시작된 비폭력적 존재를 향한 비극적인 탐색이다.
한강의 소설에서는 나무로의 신화적 변형을 단순히 도피의 서사로부터 체계적 폭력에 맞서는 비극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투쟁으로 재맥락화하였다. 그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전문가로서 작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분석이나 주장과는 무관한 개인적 고찰임을 미리 밝혀둔다.
아폴론과 다프네 신화
[폭력] 아폴론의 추격은 구애라기보다 사냥에 가깝다. 태양의 신으로서 그의 열망은 집착과 맹목성에 의해 추동되며, 납 화살로 인해 다프네는 그를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다프네는 평생을 순결하게 살고자 했고, 아폴론에 대한 거부 의지도 분명했다. 이 신화의 전개는 동의 없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적 추격을 중심에 두고 있다.
여기서 폭력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신들의 권력 다툼이 낳은 직접적 결과다. 아폴론의 오만은 에로스의 복수를 불러왔고, 그 여파 속에서 다프네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권력자들의 자존심과 힘겨루기에 희생된다. 이 서사는 권력자의 오만과 충돌이 어떻게 무고한 존재를 피해자로 만드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변신] 다프네의 변신은 심리적·물리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린 순간에 일어난다. 아폴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숲을 달렸지만 끝내 도망칠 길이 막히자, 그녀는 지쳐 쓰러지고 만다. 이 절망의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폭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기도는 인간적 상호관계 속에서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지막 애원이다.
이 변신은 역설적인 해방의 행위였다. 다프네는 남성의 강제적 욕망에 종속되는 운명을 거부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형태와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나무로의 변신은 궁극적 저항이자 동시에 자기 소멸을 의미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재물화(再物化)와 전유]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한 뒤 아폴론의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녀의 상실에 슬퍼하면서도 소유욕을 거두지 않는다. 나무가 된 다프네를 껴안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월계수를 자신의 신성한 상징으로 선포한다. 다프네의 절박한 도피 끝에 탄생한 월계수는 곧바로 아폴론의 권위로 전유되고만다.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된 그녀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이나 경기의 승자에게 수여되는 영광의 상징 ― 월계관 ― 으로 치환된다.
이 지점에서 다프네의 저항은 철저히 무력화된다.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한 극단적 반항은, 정작 그 정신을 인정받지 못한 채 가부장적 질서 속에 흡수되고 만다. 한 여성의 절박한 탈출의 상징은 남성적 업적을 기리는 트로피로 변모하고, 그녀의 비극적 저항은 오히려 그를 기념하는 영광의 표식이 되고 만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혜 변신의 트리거] 소설 <채식주의자>는 세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로, 영혜의 목소리는 대부분 부재한 채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영혜의 변신을 촉발한 계기는 생고기를 먹는 끔찍하고 폭력적인 꿈으로 표현된다.
다프네 신화가 신의 벌에서 비롯된 변신이라면, 영혜의 경우는 그녀 내면의 심리적 파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꿈은 어린 시절의 억압된 기억과 맞닿아 있다. 영혜의 아버지가 개를 폭력적으로 죽이고, 가족이 그 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먹던 장면은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기억은 고기와 그것이 상징하는 폭력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윤리적 혐오로 이어졌다. 따라서 육식을 거부하는 행위는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육식성’ 폭력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혜의 반란은 곧 가족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가족들은 그녀의 결단을 가정의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이자 정신적 이상으로 간주하며 배척했다.
[변신] 영혜의 식물로의 변신은 점진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처음의 채식주의는 극단적인 자기 박탈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음식을 거부하고 오직 물과 빛만으로 살기를 원하며, 세상의 ‘나무들은 형제’라고 믿게 된다.
이 변신은 다프네처럼 절박한 순간의 물리적 도피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의도하고 수행한 철학적·인식적 과정이다. 영혜는 식물을 폭력과 무관한 평화로운 존재로 여기고, 그와 같은 비폭력적 존재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따라서 영혜의 동기는 다프네의 경우와 뚜렷이 구별된다. 다프네가 특정 인물(아폴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무가 되었다면, 영혜는 인간성 자체의 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녀에게 나무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폭력과 착취, 그리고 의식 있는 존재가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갈망하는 이상향이었다.
[폭력에 대한 인식과 저항] 영혜가 직면하는 폭력은 다프네의 경험보다 훨씬 복잡하며,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물리적 폭력, 남편의 심리적 방치와 소유욕, 형부의 ‘식물성 예술’을 위한 관음적 대상화, 그리고 의료계의 병리적 통제 속에서 끊임없이 억압을 겪는다.
이 상황은 소설의 비극적 역설을 드러낸다. 영혜는 비폭력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자해와 자기 박탈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향한 폭력을 수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모순적 위치에 놓인다.
이처럼 소설은 폭력에 기초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진정한 순수성이란 불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혜의 자해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최소한의 시도였으나, 역설적으로 그녀를 다시 폭력의 굴레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는다.
폭력에 관한 비교 - 신화와 소설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남성의 시선과 폭력의 본질은 뚜렷하게 다르다. 아폴론의 추격은 단일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다. 반면 영혜가 직면하는 것은 훨씬 더 체계적이고 다층적인 가부장적 감시 폭력이다. 그녀의 신체는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소유욕, 형부의 예술적 착취, 그리고 의료 제도의 통제가 교차하는 투쟁의 장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차이는 폭력 묘사의 초점이 개인적 악에서 체계적 악으로 이동하는 현대적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채식주의자>는 여성의 신체가 더 이상 한 개인의 욕망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되고 착취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웅변한다.
소설은 어쩌면... 아니 한강은, 폭력의 시대를 위한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강의 소설은 고전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권력과 도피의 서사에서 폭력과 사회적 제약을 고발하는 문제 제기로 초점을 옮긴다. 다프네의 이야기가 신화적 도피의 서사라면, 영혜의 이야기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향한 비극적이면서도 급진적인 탐색이다. 그녀의 변신은 완결되지 못했지만,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는 폭력과 소비의 순환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을 드러내는 강력한 은유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업자는...
신화와 소설, 두 서사를 비교해 본 결과,
매력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다양한 유산에서 끌어낸 모티프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며, 더 강력한 구성을 가능하게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모티프의 변형과 재해석을 통해 문화와 시간을 넘어 인간의 변화하는 두려움, 욕망, 갈등을 반영하려는 시도 역시 유의미한 접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모티프를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글쓰기의 관건은 결국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핵심적 이슈를 포착해 내는 독법과 해석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곱씹어 생각해 볼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