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포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인간인 나를 이해하기 위해
지난 2년 반은 주로 ‘형성사’를 탐닉했다.
기원전 3500년 전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의 고대근동의 역사를 더듬더듬 읽고 있는 중이다.
수메르, 이집트를 근간으로 아카드, 바빌론, 히타이트를 지나 앗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를 거쳐 헬레니즘의 시작까지,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였던 고대 이스라엘에 대해 살피고 있다.
그 과정은 정사와 신화와 수많은 전승의 과정을 훑어내는 작업이다. 비롯 깊이는 없는 주마간산 격이 되겠지만.
(예시, <고대 이스라엘 역사>, <고대근동 3천 년>, <고대근동 문학선집>, <구약성경과 신들>, <고대근동의 신화와 성경의 믿음>, <고대 이집트>, <길가메쉬> 등의 책과 강의)
또 다른 여정은, 앞선 과정에서 정립된 유일신 ‘야훼’가 어떻게 나에게 하나님이 되고, 성자 예수와 연결되며, 성령으로 발현되는지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그 각각이 어떤 인식의 과정을 통해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개념을 정립해 나갔는지, 더불어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를 이루는 신학으로 발전되어 나아가는지를 추적했다. 그렇게 형성된 개념은 유럽을 거쳐 미주와 한국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사상적·도덕적·철학적 층위 속에서 오늘날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축적되어 기준이 되어 왔는지를 스스로 설명해 보려 애를 썼다. 과정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예시, <신>, <기원이론>,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논쟁>, <복음주의 신학논쟁>,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비교신학시리즈> 등)
그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구원의 약속과 실현에 관한 기록인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접근일지를 고민했던 학자들의 방법론을, 이른바 ‘해석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개론서를 또 몇 개월 동안 학습했다. 시점으로 보자면 기원전 2세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해석학적 사조의 역사를 훑어본 셈이다. 결국 그것은 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과정이었다. 물론 세상읽기를 포함하여.
(예시, <성경해석학 개론>, <왜 해석학인가>, <성경적 비판이론> 등)
물론 그 과정에서 ‘성서’의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교리) 및 교회사 등을 위한 신대원 과정과 기초 과정의 수강을 비롯해서 인문학적 접근인 구약학, 신약학 및 성서형성사 등의 학습으로 이어가는 중이다. 참고한 관련 서적 또한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나름 다양하다.
두어 주 전부터 스멀스멀 떠올랐던 생각.
지금까지의 학습은 주로 역사와 철학(신학)이라는 두 축으로 크게 대변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방식의 학습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다만 한 가지,
삼각대(트라이포드)의 한쪽 다리를 끼워 넣어야 비로소 균형을 잡고 설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더 좁혀 말하면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그것이다. 부족했던 삼각대의 한쪽 다리.
역사와 철학을 통해 외부 세계와 또한 초월적 존재를 그간 탐구해 왔다면, 이제는 인간 내면에서 피어나는 사고와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탐구해야 할 듯하다. 흔히 사람들은 이를 문학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나 보다.
앞으로는 소설을 중심으로 한 문학 읽기를 꾸준히 이어가야겠다.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전집과 같은 전집류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겠고, 개별 추천 목록을 따라가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우선은 어떤 작가가 선정한 ‘첫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가령
“오늘, 엄마가 죽었다.
혹시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_ 이방인 (알베르 카뮈, 휴머니스트, 박해현 역)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_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예출판사, 장경룡 역)
“죽음은 암갈색으로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대로를 따라 돌진하며 등장했다”
_ 블론드 (조이스 캐럴 오츠, 올, 강성희 송기철 역)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_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문학동네, 김화영 역)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_ 변신 (프란츠 카프카, 창비, 편영수 임홍배 역)
“우주(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 부르는)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_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황병하 역) 『픽션들」 책 수록 단편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이였다.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날이 84일이나 계속되었다.”
_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문예출판사, 이경식 역)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_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최세희 역)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_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문학동네, 박형규 역)
"나는 이제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남자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일렀다.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일렀다.
그때 벌써 전화벨이 울렸다.
_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페터 빅셸, 위즈덤하우스, 이용숙 역) 『책상은 책상이다, 책 수록 단편
이런 소설들 말이다.
어떤 건 읽었고, 또 어떤 것은 읽지 못했다.
일주일에 최소 한 권 이상은 (소설을) 읽어가며,
내 안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조그마한 편린만일 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3년을 읽는다 해도 150여 권 정도다. 어림없다. 최소 6년은 읽어야 할 듯하다. 뭐 어떠랴 어차피 보내질 시간인 것을...)
시는 또 어떨까?
<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9월 15일에 입수한,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편의 첫 장에 수록된 시다.
시편 또한 주요한 접근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무언들 대수겠나, 읽고 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해 가는 것이지.
어찌 되었건, 목표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