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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법노트

『식물들의 사생활』에 나타난 변신 모티프와 신화적 원형

이승우 소설 읽기

by KEN

'고독', '욕망', '죄의식', '사랑', '구원', '인간의 양면성' 등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평가받는 소설가가 있죠.

소위 '관념적 리얼리즘'이자 '구도자적' 작가로 문단에서 평가받고 있는 소설가 이승우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철학적 깊이와 종교적 탐구를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평입니다.


이승우 작가를 처음 접했던 건 그이의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주요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각자의 관점에서 '신과 나' 사이의 사건들을 소설적으로 재해석하는 작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념적인 사유가 집약된 작품을 쓰는 작가로 평가하더군요.

아무튼 그이의 소설집 『사랑이 한 일』은 저 또한 꽤 여러 권 사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작품집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이의 또 다른 소설을 배경으로, 서구의 신화적 모티브를 차용하여 멋지게 작화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해 보려 합니다. 앞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의 변신 이야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이승우식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한 사람의 사랑이 한계에 부딪힌 후, 식물로 변화되거나 식물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은 인간 내면의 깊은 욕망과 좌절된 사랑을 '식물'이라는 독특하고 사색적인 메타포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서사는 인간의 형상이 비인간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을 다룬 서구 문학의 원형적 상상력에 깊이 뿌리내린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같은 고대 신화 서사를 연상시킨다.


신화 속 변신 모티프

A.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서시
나의 마음이 깊이 감동하여 낯선 몸으로 변신한 형체들을 노래하고자 하노라.
오, 신들이시여,
이들을 이렇게 변신시킨 이는 바로 당신들이오니 나에게 영감을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시작부터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이어지는 이 연속되는 노래를 내가 끝까지 잘 부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여러 버전의 변신 이야기 번역본이 있습니다만, 열린책들의 번역본으로 서시를 옮겨본다.

학술적인 것을 떠나, 우선 당장 읽기에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버전으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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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무너지는 150여 편의 이야기를 통해 고대 로마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문학적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변신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신들의 압도적인 권능에 의해 강제되거나 인간의 오만에 대한 징벌, 혹은 구애를 피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속에는 인간의 삶이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언제든 덮쳐오는 거대한 외부의 힘과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는 고대 세계의 인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변신은 곧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숙명’의 형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작품, 『식물들의 사생활』과 흥미로운 대비를 발견하게 된다. 오비디우스의 세계에서 변신이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운명의 소용돌이라면, 『식물들의 사생활』 속 변신은 오히려 내면에서 비롯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두 작품은 같은 ‘변신’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하나는 운명의 불가피성을, 다른 하나는 존재의 자발성과 내적 성숙을 드러내며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이다.


이 대조는 단순한 문학적 기법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태도의 차이를 드러낸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 고대인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식물들의 사생활』은 자기 내면을 응시하며 선택과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현대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B. 다프네 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1부 8번째 이야기로 기록된 '월계수가 된 다프네'의 이야기는 인간이 식물로 변하는 대표적 사례로, 『식물들의 사생활』과의 연관성을 탐색하는 데 중요한 원형으로 자리한다. 다프네는 아폴론의 집요한 구애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결국 월계수로 변신함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 변신은 다프네 스스로의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 외부의 신적 개입에 의존한 수동적 행위에 가깝다. (이전 포스팅인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의 서술도 같은 모티브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폴론의 태도 변화다. 욕망의 대상이 손에 닿지 않는 나무로 변하자, 그는 오히려 다프네의 월계수 잎을 모아 월계관을 만들고 이를 자신의 신목(神木)으로 삼는다. 좌절된 사랑은 그 순간 종결되지만, 동시에 그 잔해는 아폴론의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승화된다. 이 신화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끝내 ‘부재의 아픔’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에게는 어떤 영원한 기호와 상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승우의 소설 역시 이 신화의 문법을 계승한다. 좌절된 사랑이 식물로 변신하며 ‘사랑의 성소’ 혹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 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닮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변신은 단순히 남겨진 이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변신한 존재가 인물들의 내면적 욕망을 드러내고 구현하는 주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다프네 신화의 수동적 서사를 넘어서는 보다 능동적이고 내면화된 변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식물들의 사생활』

A. '동물성 욕망'과 '식물성 욕망'의 대립

이승우는 소설을 통해 인간 욕망의 양가적 성격을 ‘동물성 욕망’과 ‘식물성 욕망’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동물성 욕망’은 현실 사회의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논리에 깊이 물든 욕망으로,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상대를 압도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것은 장애물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며, 결국 파괴를 통해서만 충족을 얻는 욕망이다. 소설 속 우현은 불구가 된 육체로 인해 식물처럼 정지된 존재가 되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이 ‘동물적 욕망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승우는 바로 그 내면의 갈등을 세밀하게 외화시켜, 독자로 하여금 욕망의 본질과 인간 조건을 마주하게 한다.


이에 반해 ‘식물성 욕망’은 동물성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적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식물은 결코 직접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 대신 물러서고, 돌아가고, 우회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집요함의 다른 형태이다. ‘식물성 욕망’은 천천히, 그러나 끝내 뿌리를 내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지향성 속에 그 힘을 드러낸다.


결국 소설 속 변신은 이 두 욕망의 대립과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장면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동물적 욕망이 한순간의 충돌과 파괴에 머무는 동안, 식물적 욕망이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결국 승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대립의 역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현실의 폭력적 논리를 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제시하는 상징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B. 노자의 상선약수 정신과 식물성 욕망의 연결

연구 자료에 따르면, ‘식물성 욕망’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정신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물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낮은 곳을 찾아 우회하며 흐름을 이어간다. 이와 같은 ‘완강한 온화함’과 ‘집요한 지향성’은 곧 식물의 속성, 나아가 ‘식물성 욕망’의 본질과 일치한다. ([논문] 이승우의『식물들의 사생활』에 나타난 식물성 욕망과 상선약수 정신, 저자: 방재석/이진영, 2014)

[참고]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의 『도덕경』 제8장에 등장하는 구절로,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 노자는 물을 자연과 순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며, 자신을 낮추고, 다투지 않고, 어떤 그릇에도 그 형태를 바꾸는 유연성과 포용력을 가진 존재로 상징했다.


따라서 소설 속 변신 서사는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동양 철학적 사유 위에 구축된, 현실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인간이 식물로 변한다는 것은 곧 ‘동물적 속성’을 내려놓고 ‘상선약수’의 정신을 몸소 체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좌절된 욕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회하고 집요하게 지향해 온 끝에 그 욕망을 초월적 차원에서 완성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즉, 이 서사는 좌절과 파괴의 은유를 넘어, 존재가 스스로를 변형시켜 보다 근원적인 조화와 성취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철학적 알레고리라 할 수 있겠다.



변신을 통한 욕망의 승화

A. 어머니와 옛 애인의 사랑: 야자나무가 된 '사랑의 성소'

소설은 어머니와 옛 연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 그루 야자나무로 형상화하며, 그것을 그들만의 ‘사랑의 성소’로 세운다. 이 야자나무는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을 기념하는 표지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그것은 ‘하늘과 시간을 떠받치는 존재’로 묘사되며, 결국 그들의 사랑이 더 높은 질서의 힘에 의해 완성되었음을 암시한다.

[참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하늘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떠받치고 있는 야자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햇살은 바다 위에 떨어져서 눈물이 된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 그러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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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 변신이 신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우발적이고 비장소적인 사건과 달리, ‘남천’이라는 특정한 장소, 곧 신성한 공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간적 맥락 속에서 변신은 그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결과가 아니라, 성스러운 힘과 결부된 의례적 사건으로 격상된다.


또한 야자나무는 단 한순간의 변형으로 머물지 않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는 두 연인의 사랑을 품고 서 있음으로써, 변신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시간 속에 응축된 욕망의 결실임을 보여준다. 즉, 이 서사에서 변신은 ‘사랑의 좌절’을 마감 짓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을 시간과 공간 속에 영속화하는 초월적 장치로 기능한다.


B. 우현과 순미의 사랑: 소나무와 때죽나무로 구현된 좌절의 완성

두 번째 변신 서사는 우현과 순미의 사랑을 매개로 전개된다. 군대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우현은 더 이상 연인 순미와의 현실적 사랑을 이어갈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는 숲 속에서 소나무를 칭칭 감아 오르는 때죽나무를 발견하고, 자신의 좌절된 사랑을 그 나무에 ‘빙의’시키듯 이입한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결합은 앞서 야자나무의 변신 서사와 동일한 ‘욕망–사랑–변신’의 구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변신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첫 번째 서사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서사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우현과 순미의 사랑은 어머니와 옛 애인의 사랑이 남긴 흔적을 이어받아, 변신을 통해 마침내 그 서사의 ‘신화적 완성’을 이룬다.


이로써 작가는 변신을 단일 사건의 차원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인간의 ‘좌절된 사랑’과, 그것이 변신을 통해 도달하는 ‘초월적 완성’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한다. 두 번째 서사는 첫 번째 이야기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동시에 그 의미를 확장하고 심화시켜, 사랑과 욕망이 어떻게 시간과 존재를 넘어서는 신화적 질서 속에 편입되는지를 보여준다.


C. '남천'의 상징적 의미와 기능

‘남천’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간직한 장소이자,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의 비밀이 드러나고 순미가 우현을 구원하는 극적인 순간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과 비극을 넘어서는 ‘꿈의 장소’이자 ‘식물성의 절대사랑’이 구현되는 성역과도 같다.


특히 ‘남천’은 신화 속 올림포스가 그러하듯, 인간의 욕망이 신성한 차원으로 변모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는 소설 속 변신이 단순한 물리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곧 ‘남천’은 인간의 좌절과 고통이 성화되는 지점이자, 사랑이 신화적 차원으로 승격되는 성소로 자리매김한다. (참고, 신형철 해설, 소설의 뒤편에 편집됨, 사진 참조)


이처럼 남천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신화적 상징이자 구원의 무대이며, 인간의 욕망을 초월적 의미로 전환시키는 근원적 장소로 그려진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은 신화적 변신 모티프를 단순히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 고유의 철학과 세계관을 투영하여 새롭게 재창조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앞서 기술했듯이 이 소설에서의 변신은 외부의 초월적 힘에 의해 강제되는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식물성 욕망’을 통해 좌절된 사랑을 ‘초월적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 행위로 그려진다.

이는 현실 세계의 ‘동물성’을 거부하고, 노자의 ‘상선약수’ 정신을 따라 더 높은 차원의 구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승우 문학의 핵심적 사유가 서사적으로 형상화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우 작가 자신이 “갈망 너머에 있는 구원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듯이,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식물성 욕망’과 ‘변신’은 바로 그 구원을 향한 가장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사랑이라는 원초적 갈망이 현실적 한계에 부딪힐 때, 변신은 좌절을 파괴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우회와 집요함을 통해 ‘식물’이라는 영원한 형상으로 승화한다. 그리하여 끝내 ‘이름 없는 큰 사랑’으로 도약하는 길을 열어 보인다.


이승우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좌절, 그리고 변신의 의미를 다시 묻도록 만든다. 그것은 단지 한 편의 신화적 재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연과 세계의 질서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낸 문학적 응답이며, 우리 삶 속에서 사랑과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를 끝없이 사유하게 하는 열린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더 깊은 소설 읽기를 통해, 각 작가들의 세계관과 사유의 깊은 곳까지 탐험해 보는 것 또한, 결국은 '나를 이해해 가는 또 다른 길'이 아닐까 싶다.


계속 가 보겠습니다.



이 작품에 어울릴만한 음악을 함께 공유합니다.

평안한 감상 되시길 바랍니다.


Chopin: Nocturne No. 19 in E minor, Op. 72 No. 1 백건우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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