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저항의 서사와 미학적 실천

by KEN

돌이켜보면, 그는 참으로 위대한 거인이었다.


인간 김민기.

그이의 행적은 2024년에 방영되었던 SBS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를 보실 것을 권한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이다.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1.

'어둠'과 '빛'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폭압적 통치와 급격한 산업화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이 임계점에 다다르던 시기였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그리고 인권 유린에 신음하던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존재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78년 발표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라 하겠다.


<공장의 불빛>은 당시 합법적인 유통 경로를 통하지 않고 이른바 '비합법 카세트테이프'의 형태로 제작되어 알음알음 배포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검열과 감시가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문화적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김민기는 밝힌다. 이번 이야기는 2024년 4월에 SBS에서 방영하고, 넷플릭스에 오픈되어 스트리밍 중인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1,2,3편의 내용 등을 참고하여 작품의 탄생 배경이 된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한 당대의 노동 현실을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작품 내에서 사용된 음악적 기법과 장르적 혼종성,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상징성을 분석함으로써 이 작품이 갖는 문학적, 음악적, 사회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김민기는 이 작품을 서구적인 의미의 뮤지컬이나 오라토리오가 아닌 '노래굿'으로 명명하였다. 여기서 '굿'이란 한국의 전통적 무속 신앙에서 유래한 제의적 형식을 의미한다. 굿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고(해원), 산 자들의 막힌 가슴을 뚫어주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을 수행한다. 김민기는 서구의 공연 양식을 빌려오되, 그 정신적 뿌리를 한국의 민중적 전통에 둠으로써 노동자들의 고통과 투쟁을 하나의 거대한 제의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대사 없이 오로지 노래로만 극이 진행되는 '성스루(Sung-through)'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오페라나 뮤지컬의 문법과 유사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정서는 한과 신명이라는 한국적 미학에 닿아 있다. 김창남¹과 이영미² 같은 비평가들은 이를 '노래극' 혹은 '노래굿'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분류하며, 서구 뮤지컬의 단순한 모방이 아닌 한국적 음악극의 새로운 지평을 연 시도로 평가한다.

1) 김창남은 『공장의 불빛』을 1970년대 후반 마당극 운동과 민중극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대표적 성과로 평가한다. 그는 이 작품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노래와 연극적 형식으로 결합함으로써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 문화사적 의의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다. 특히 공장의 불빛이 발표 이후 약 2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된 과정을 언급하며, 그동안 억압되었던 작품의 역사적 가치가 재발견되는 동시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 또한 함께 제시한다.
2) 이영미는 『공장의 불빛』을 비롯한 민중가요와 비합법 음반들이 수행한 문화적 역할과 그 내재적 한계를 심층적으로 논의한다. 그녀는 이 작품이 단순한 노래의 차원을 넘어, 극적 구성과 서사적 확장을 통해 표현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였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실험이 김민기의 작업을 마당극 및 음악극 운동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이영미는 공장의 불빛이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과 집단적 연대 의지를 음악과 연극의 결합을 통해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당대 민중문화운동 속에서 지닌 중요한 문화운동사적 의미를 평가한다.



2.

야만의 시대의 기록: 공순이의 삶


1970년대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에 따라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성장의 과실은 재벌과 자본가들에게 집중되었고, 노동자들은 '산업 역군'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철저히 소외되었다. 특히 섬유, 봉제, 가발 등 경공업 분야에 종사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좁은 벌집방에서 생활하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은 사회적으로 공순이, 공돌이라 비하당하며 이중 삼중의 억압을 겪었다.


<공장의 불빛>의 주인공인 '언니'와 '순이'는 바로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을 표상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혹은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공장 기계 소음 속에 파묻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보편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었다. 김민기는 1977년 부평의 한 봉제 공장에 취업하여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한글과 노래를 가르치며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갔고, 그 경험은 <공장의 불빛>을 창작하는 직접적인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서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은 1978년 발생한 '동일방직 사건'으로 알려진다. 인천에 위치한 동일방직은 1972년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초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며 민주노조의 상징으로 떠오른 사업장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을 이어받아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러나 회사 측과 결탁한 어용 세력(남성 중심의 반대파 노조원)은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상상하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다.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 당일, 회사 측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은 투표장으로 향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미리 준비한 인분(똥물)을 투척하고 입에 처넣는 엽기적인 테러를 자행했다. 경찰은 이를 수수방관했고,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동일방직 노조는 와해되었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김민기는 이 사건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단순히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구조적 모순을 예술적으로 고발하고자 했다. 비록 작품 속에서는 특정 공장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으나, '똥물 투척'이나 '구사대 난입'과 같은 극적인 장치들은 동일방직 사건의 참상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김민기는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회고하며, 이 작품이 특정 사건의 기록을 넘어선 보편적인 리얼리즘을 지향했음을 밝힌 바 있다.


1978년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가 말기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긴급조치로 대변되는 공포 정치는 사회 전반을 옥죄고 있었으나, 수면 아래에서는 변화를 갈망하는 에너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YH 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 부마항쟁, 그리고 10.26 사태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국 민주화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공장의 불빛>은 이러한 거대한 폭발 직전의 긴장감을 포착했다. 야당이 해산되고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던 시기,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이 작품은 다가올 변혁을 예고하는 묵시록과도 같았다. 김민기는 이 작품을 통해 "야당을 해산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멀리서 반드시 쓰러질 것"인 독재 권력의 종말을 예술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3.

제작 및 녹음


<공장의 불빛> 제작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작전이었다. 이미 당국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정상적인 스튜디오 녹음이나 음반 발매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모든 과정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비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녹음 장소는 가수 송창식이 운영하던 스튜디오였다. 외부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방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모든 창문을 두꺼운 담요로 겹겹이 막은 채 한밤중에 녹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의 녹음은 당시의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위험한 프로젝트에는 전문 배우나 가수가 아닌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특히 이화여대 노래패와 방송반 학생들이 코러스와 주요 배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체포와 제적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민기의 뜻에 동참했다.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기교 없이 투박하고 진실한 울림을 만들어냈으며, 현장 노동자들의 정서와 공명하는 효과를 낳았다.


녹음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악보를 숨기거나 가명을 사용하는 등 신변 보호를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김민기 역시 이전 앨범 작업 시 '김아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공장의 불빛> 테이프에는 보란 듯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며 투옥을 각오한 결기를 보여주었다.


김민기가 선택한 매체는 카세트테이프였다. 이는 당시의 기술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 탁월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먼저는 접근성 측면이다. 1970년대 후반, 카세트 플레이어는 노동자들의 자취방까지 보급된 가장 대중적인 음향 기기였다. 김민기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다. 둘째는 복제 및 유통의 용이성이다. LP는 제작 공정이 복잡하고 대규모 설비가 필요하여 당국의 통제 하에 놓이기 쉬웠다. 반면 카세트테이프는 마스터 테이프 하나만 있으면 일반 가정용 데크를 이용해 무한정 복제가 가능했다. 이는 중앙정보부의 압수 수색에도 불구하고 테이프가 살아남아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세 번째는 참여 유도형 구성(Side B)이 될 것이다. 이 앨범의 가장 혁신적인 점은 바로 '뒷면(Side B)'의 활용이다. 앞면(Side A)에는 전체 노래극이 완성된 형태로 수록되어 있지만, 뒷면에는 노래를 제외한 반주(MR)만이 수록되었다. 이는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개사하여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유도한 장치였다. 김민기는 이 작품이 단순한 감상용 콘텐츠로 소비되는 것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부르는 '행동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4.

노래 굿 공장의 불빛


<공장의 불빛>은 총 12개의 트랙(세부적으로 나누면 더 많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곡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기승전결의 뚜렷한 서사 구조를 형성한다. (아래 유튜브 링크는 2004년 재 발매 음원을 기준으로 한다)


Track 1: 서곡 (Overture)

극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곡으로, 어둡고 무거운 신시사이저 음향과 긴박한 리듬이 교차하며 앞으로 전개될 비극적 사건을 암시한다. 공장의 기계 소음을 연상시키는 불협화음이 특징적이다.


Track 2: 편지

주인공 '언니'가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에게 쓰는 편지를 낭독하듯 부르는 노래이다.

"돈 벌어 오겠다"며 집을 떠난 딸의 안부와 동생의 학비를 걱정하는 내용은 당시 이농민 가정의 전형적인 서사를 보여준다. 서정적인 기타 선율과 담담한 보컬은 슬픔을 절제하며 오히려 더 큰 비애감을 자아낸다. 이 곡은 앨범의 타이틀곡 성격을 띠며 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한다.


Track 3: 교대 I, 교대 II

공장의 쉴 새 없는 작업 리듬을 묘사한다. 1부와 2부 사이에 '아범'이 프레스 기계에 손을 다치는 산업 재해 사건이 발생한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리듬이 강조되어 노동자들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공장의 비인간성을 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사고 발생하는 순간의 날카로운 효과음은 충격을 극대화한다.


Track 4: 야근

살인적인 철야 작업을 견디며 부르는 노동요. 졸음을 쫓기 위해 타이밍(각성제)을 먹어가며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을 그린다. 이 곡의 멜로디는 놀랍게도 일제강점기 일본 군가인 '군대 소곡(Kuntai Kouta, 일명 김일병 노래)'을 차용했다. 김민기는 왜 하필 일본 군가를 차용했을까? 이는 1970년대 한국의 산업 현장이 식민지 시대의 군대나 다름없는 병영 국가적 통제 하에 있음을 음악적으로 폭로하기 위함이다. "서방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라는 가사는 산업 재해로 잘려 나간 손가락을 해학적으로 비틀며, 비극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민중적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 곡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야근'이라는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명곡으로 꼽힌다.


Track 5: 공장의 불빛

가장 어린 노동자 '순이'의 독백. 공장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저 불빛 속에는 누가 살길래"라며 묻는 순이의 질문은 성장(불빛)과 소외(어둠)라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순이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잔혹한 현실과 대비되어 비극성을 고조시킨다.


Track 6: 선거테마 / 음모 / 돈만 벌어라

노조 설립을 막으려는 사장과 공장장, 그리고 고용된 깡패(구사대)들의 모의를 다룬다. 이 대목에서 김민기의 음악적 실험이 돋보인다. 사장과 깡패들의 노래는 강렬한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 뽕짝, 그리고 국악의 자진모리장단이 기묘하게 뒤섞인 형태로 나타난다. "돈만 벌어라", "인정 찾고 양심 찾고 개소리들 허덜 말라", "대한민국 주식회사" 등의 가사는 천민자본주의의 탐욕과 황금만능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김민기는 악인들의 주제가에 경박하고 우스꽝스러운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풍자의 전략을 구사한다.


Track 7: 전야 / 노조설립

억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각성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결의하는 과정. 비장한 합창과 결의에 찬 목소리가 교차하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Track 8: 난입 / 유린

노조 결성식장에 깡패들이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기물을 파손한다. 동일방직 사건의 '똥물 투척'을 연상시키는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비명 소리, 유리창 깨지는 소리, 욕설 등이 뒤섞인 구체음적 기법을 사용하여 폭력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노조 설립 시도는 무참히 좌절된다.


Track 9: 두어라 가자 / 재기

폭력적 진압 이후 '언니'는 "두어라 가자"라며 절망과 체념에 빠지지만, 곧이어 동료들의 격려 속에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하는 '재기'로 이어진다.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변증법적 전환점이다. 개인의 좌절이 공동체의 위로를 통해 치유되고 다시 투쟁의 동력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Track 10: 이 세상 어딘가에

노동자 전체가 부르는 대합창곡. 작품의 주제 의식이 집약된 클라이맥스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무도 가련한 우리"라는 가사는 개별 사업장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 소외된 노동자들과의 정서적 연대를 호소한다. 장엄하고 숭고한 멜로디는 종교적 성가(聖歌)를 연상시키며, 노동 해방을 향한 염원을 거룩하게 표현한다. 옥타브 도약을 통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곡 기법이 돋보인다.


Track 11: 연행 / 해고 / 아침바람

결국 주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해고당한다. 그러나 극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침바람 찬 바람에"라는 구전 가요 멜로디와 함께 김민기의 육성 메시지가 등장한다.

김민기는 내레이션을 통해 비록 지금은 패배했으나 투쟁의 정당성을 잃지 말 것, 그리고 노조의 중요성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는 극 중 인물이 아닌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청중(노동자)에게 말을 거는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Track 12: 이 세상 어딘가에 II

현실을 직시하고 떠나는 '언니'와 여전히 헛된 꿈(신분 상승)을 꾸는 '옥이'의 목소리가 대비되며 막을 내린다. 김민기는 명확한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는다. 모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여운을 남기며 청중에게 실천의 과제를 던진다.



5.

시대의 모순을 입은 인간들


김민기는 등장인물들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도식화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속에 놓인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인간 군상으로 그려냈다. 이는 노동자와 사용자, 심지어 구사대까지도 모두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작가의 휴머니즘적 시각을 반영한다.


언니: 희생과 각성의 표상

고향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가부장적 효 사상)과 자신의 삶을 찾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폐병 3기라는 육체적 고통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노동 강도의 살인성을 상징한다. 처음에는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노동자였으나, 동료들의 고통과 회사의 횡포를 목격하며 점차 계급적 자각을 얻고 노조 활동의 주체로 성장한다. 그녀는 19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운동사를 이끌었던 수많은 '언니'들의 초상이다.


영자: 실천하는 지성

노조 설립에 가장 적극적이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전투적인 성격의 소유자. 회사 측에 협조적인 '옥이'와 끊임없이 대립하며 극의 긴장감을 주도한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선동하는 리더 역할을 수행하며, '언니'의 각성을 돕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옥이: 허위의식의 희생자

생산직이 아닌 서무(사무직) 직원으로, 자신을 '공순이'들과 구별 짓고 싶어 하는 인물. 그녀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논리를 내면화한 '쁘띠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을 대변한다. 김민기는 옥이를 통해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열과 단결을 저해하는 요소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그녀는 결국 끝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환상 속에 남겨진다.


아범: 시스템이 낳은 괴물

한때는 성실한 노동자이자 '언니'의 연인이었으나,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잃고 해고당한 뒤 타락한다.

생존을 위해 어용 노조의 행동대원이 되어 옛 동료들을 탄압하는 '구사대'가 된다. 그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의 비정한 메커니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의 타락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보다는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사회 구조에 기인한다.


사장 및 깡패: 탐욕의 캐리커처

이들은 인격체라기보다는 '탐욕'과 '폭력'이라는 추상적 악덕이 의인화된 존재들이다. 김민기는 이들에게 록, 트로트, 국악이 뒤섞인 기괴한 음악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저속함과 비정상성을 청각적으로 풍자한다.



6.

파장


1978년 배포된 2,000여 개의 테이프는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테이프는 단순한 노래 모음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대변해 주는 위로였고, 대학생들에게는 노동 현실을 깨우치는 교과서였다. 수많은 대학의 탈춤반과 노래패들이 이 작품을 대본 삼아 공연을 올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문화 활동'들이 배출되었다.


오랫동안 조악한 불법 복제 테이프로만 떠돌던 <공장의 불빛>은 2004년, 발매 26년 만에 정식 음반으로 복원된다. 학전과 김민기는 후배 뮤지션 정재일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 김민기는 정재일에게 "원곡에 구애받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정재일은 원작의 로우-파이(Low-Fi)한 감성을 현대적인 세련미로 다듬되, 그 안에 담긴 저항의 정신은 훼손하지 않았다. 이지영(빅마마), 이승열, 이소은 등 실력파 보컬리스트들이 참여하여 노래의 완성도를 높였고, 록과 일렉트로닉, 그리고 국악기를 더욱 과감하게 배치하여 김민기가 1978년에 꿈꾸었던 사운드를 21세기의 기술로 구현해 냈다. 이 복원 작업은 <공장의 불빛>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생명력을 지닌 텍스트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7.

결(結)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탄생한, 그러나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예술적 저항의 기록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동일방직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했으나, 인간 소외와 억압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룸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호소력을 획득했다는 평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비정규직 문제, 플랫폼 노동자의 등장, 여전한 산업 재해 등 노동의 위기는 형태만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 가련한 우리"가 존재하는 한, <공장의 불빛>이 던지는 "돈만 벌어라"는 자본의 명령에 대한 야유와 인간다운 삶을 향한 절규는 여전히 유효하다. 김민기가 1978년 쏘아 올린 그 불빛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추며,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공장의 불빛(1978)' 공연 촬영본

김민기가 육성으로 소개하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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