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성(polyphony)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을 다시 생각하며...

by KEN

책 읽기는 어쩌면 바흐찐을 알기 이전(before)과 이후(after)로 나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그의 대화이론을 접하기 전까지 저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 안에 이미 내재된 저자의 의도텍스트가 지닌 고유한 방향성, 그리고 그것을 읽는 나 자신의 의도가 서로 얽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흐찐을 읽고 난 이후, 독서의 풍경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텍스트는 더 이상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닫힌 대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긴장하며 의미를 생성하는 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텍스트 읽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타인과의 대화, 강연을 듣는 자리, 뉴스를 접하는 순간,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할 때에도 저는 자연스럽게 화자의 의도와 작가의 의도, 더 나아가 그것을 듣고 보고 있는 나 자신의 상태와 위치를 함께 성찰하게 됩니다. 말과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목소리로 울리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시선과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다층적 공간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근본적으로 이끌어낸 것이 바로 바흐찐의 ‘다성성(polyphony)’ 개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을 조금 더 진지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

'독백'을 넘어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대화'의 세계로..


평가에 의하면, 20세기 지성사에서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찐(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거대한 분기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폭압, 그리고 강제 이주라는 개인적 비극 속에서도 묵묵히 써 내려간 그의 저작들은 당대의 주류였던 러시아 형식주의의 기계적 분석과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반영론 모두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시했다는 것이죠.


바흐찐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다성성(polyphony)'이라는 개념일 겁니다. 이는 단순한 문학 비평 용어를 넘어, 근대적 자아의 폐쇄성을 해체하고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철학적 기획이자, 언어라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론적 틀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바흐찐 사유의 정수인 '다성성'을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 의식의 본질을 '대화'로 재규정했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입니다. 특히 그의 주저인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 문제(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1963)와 언어철학 에세이들을 횡단하며, 다성성이 지닌 미학적 구조와 윤리적 함의,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현대적 의의를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설프겠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바흐찐이 톨스토이로 대표되는 독백적(monologic) 세계관과 어떻게 치열하게 대결했는지,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를 추적해 보려는 겁니다. 이는 텍스트라는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작가와 주인공, 그리고 독자 간의 역동적인 긴장과 화해의 드라마를 복원하는 작업일 거라는 기대이기도 합니다.



2.

다성성(polyphony)의 이론적 기초


'다성성(多聲性)' 혹은 '복조(複調)'라는 용어는 본래 음악 이론에서 기원합니다.

단선율이 지배하는 모노포니(monophony)나, 주선율에 화성이 종속되는 호모포니(homophony)와 달리, 폴리포니(polyphony)는 서로 독립된 가치를 지닌 여러 성부가 대위법적으로 결합하여 동등한 비중으로 흐르는 음악 형식을 가리킵니다. 바흐찐은 이 음악적 개념을 소설 미학의 영역으로 끌어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전례 없는 혁신성을 설명하는 핵심 기제로 활용했던 것이죠.


그러나 바흐찐의 다성성은 단순한 은유를 넘어섭니다.


소설에서의 다성성이란, 작가의 의식에 의해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이고 융합되지 않은 목소리와 의식들의 다수성"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여타 많은 소설에서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목소리를 내지만, 바흐찐은 이를 엄밀한 의미의 다성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목소리는 결국 작가의 의도라는 단일한 중심으로 수렴되거나, 작가가 미리 설계한 세계관을 입증하기 위한 기능적 장치로 귀속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바흐찐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발견한 다성적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더 이상 작가의 ‘대상(object)’으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인물은 작가와 대등한 권리를 지닌 ‘주체(subject)’로서, 스스로의 세계관과 진리를 끝까지 주장하며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유지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성성은 하나의 서술 기법을 넘어, 인간 의식과 존재를 이해하는 새로운 문학적·철학적 원리로 확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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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성성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척점에 있는 독백주의(monologism)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바흐찐은 서구의 철학적 전통과 대부분의 근대 소설이 독백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독백적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의 의식(작가, 신, 절대정신)만이 참된 주체로 간주되며, 그 밖의 모든 의식은 그 주체가 인식하고 규정하는 대상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죠.


바흐찐은 이러한 독백적 구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세 죽음」¹을 제시합니다. 이 작품에는 귀부인, 마부, 그리고 나무의 죽음이 차례로 묘사되지만, 이 세 존재는 서로를 향해 말하지도, 서로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작가인 톨스토이만이 이 서로 다른 죽음들을 하나의 시야 안에 포괄하고, 그것들을 연결함으로써 독자에게 ‘죽음의 본질’에 대한 단일하고 완결된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더 이상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를 입증하기 위한 예증적 재료로 기능합니다. 그들은 모두 작가가 소유한 ‘잉여 시각(surplus of vision)’ 속에 포획되어 있으며, 자신의 시야를 넘어선 의미를 스스로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흐찐이 경계한 ‘마무리의 폭력’입니다. 독백적 작가는 인물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고, 그들의 삶에 확정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살아 있는 의식을 닫힌 형식 속에 가두고 결국 ‘죽은 사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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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명확히 ‘중심의 해체’를 지향한다고 할 것입니다. 바흐찐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들—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 이반 카라마조프(『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스타브로긴(『악령』) 등—은 결코 작가의 꼭두각시만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작가조차도 완전히 논파하거나 흡수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작가의 의식 바깥에서 독자적인 사유의 공간을 구축하며 작가에게 저항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인물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대신, 인물들의 목소리와 자신의 의도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채 충돌하고 교차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 뒀다는 것이죠.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단순한 서사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철학적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흐찐에게 인간이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심지어 창조자인 작가에 의해서조차) 최종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인 겁니다. 인간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타자의 말과 응답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가는 미완결적 존재 남는다는 것이죠.



3.

작가와 주인공


바흐찐의 초기 미학 에세이인 「예술과 책임」 및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은 다성성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외면성(vnenakhodimost, outsideness)'이랍니다. 점점 어려워지지만, 더욱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을 위해 옮겨봅니다.. -.-;;;



우리는 흔히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감정이입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바흐찐은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완전한 감정이입은 오히려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역설합니다. 내가 완전히 타인이 되어버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타인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하나의 온전한 형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바깥—시공간적·문화적 외부—에 위치해야 한다는 겁니다. 타인이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그의 등 뒤에 드리운 그림자나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표정, 나아가 그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밖에 있는 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관점이 바흐찐이 말한 ‘잉여 시각(surplus of vision)’입니다. 이는 타자를 대상화하거나 지배하기 위한 시선이 아니라, 타자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의미의 지평을 보완적으로 제공하는 외부의 시선이며, 작가가 주인공을 대할 때 반드시 유지해야 할 윤리적·미학적 거리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 ‘잉여 시각’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있습니다.


독백적 작가의 경우, 자신의 잉여 지식을 사용해 주인공을 규정하고 완결 지으려 합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과 운명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며, 그의 행동과 심리를 자신의 해석 틀 안에서 설명해 버립니다. 이때 인물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의식이 아니라, 작가의 인식을 입증하기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바흐찐의 관점에서 이는 타자를 사물화 하는 인식론적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반면 다성적 작가는 잉여 시각을 지니되, 그것을 인물을 확정하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흐찐은 이러한 태도를 ‘사랑 어린 잉여’에 비유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가진 잉여 지식을 인물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대신, 그것을 인물에게 넘겨주거나 인물 스스로 깨닫게 함으로써 작가와 대등한 위치에 서도록 합니다. 작가는 인물의 ‘미완결성’을 존중하며, 그가 언제든 자신에게 부여된 규정을 깨고 새롭게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 곧 하나의 허점(loophole)을 끝까지 열어 둡니다.


이로써 다성적 소설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는 더 이상 ‘창조주–피조물’의 위계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타자’라는 두 주체가 서로를 향해 말 걸고 응답하는 긴장감 넘치는 윤리적 관계로 승화되는 것이죠. 바흐찐이 이를 두고 “창조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반기를 들고 논쟁을 벌이는 기적”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미완결성’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성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4.

도스토예프스키


바흐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분석을 통해 다성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입증합니다. 그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외면적 행동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의식의 드라마라는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흔히 비정상적일 만큼 비대해진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로 해석됩니다. 그들에게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의 의미로 존재하기보다는 자기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한 재료로 환원되면서 말이죠. 가난이나 살인, 연애와 같은 극단적 경험들조차도 삶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험대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미완결성(unfinalizability, nezavershennost)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결코 한 문장, 한 가지 규정으로 포착될 수 없습니다. “그는 악인이다” 혹은 “그는 성자다”와 같은 단정적 정의는 곧바로 인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의해 배반당합니다. 바흐찐은 이를 두고 “인간은 자신이 긍정하는 것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자신이 부정하는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들을 완결 짓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통찰입니다. (구약성서의 많은 인물들 또한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까지도 말이죠. 바로 그런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흐찐이 지적하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결말은 대개 닫히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서사는 끝나지만,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작품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 문제』중에서)


바흐찐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분석하면서, 전통적으로 ‘내적 독백’이라 불려 온 것이 사실은 치열한 ‘미시 대화(micro-dialogue)’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관과도 같은 좁은 방 안에서 홀로 사유에 잠길 때조차,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어머니의 편지, 여동생 두냐의 희생, 소냐의 침묵,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비꼬는 목소리, 마르멜라도프의 절규가 각기 다른 억양과 시선으로 끊임없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고, 그들이 던질 법한 비난과 질문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거나 반박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믿으시겠지만(타자의 목소리 1), 그것은 기만이다. 나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있다(나의 반박). 소냐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또 다른 타자의 목소리 2)”


이처럼 하나의 발화 내부에 타자의 목소리가 스며들어 겹쳐지는 현상을 바흐찐은 ‘이중 목소리 담론(double-voiced discourse)’이라 명명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은 결코 단일하고 통일된 자아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교섭하는 전장에 가깝습니다. 바흐찐은 이 분석을 통해, 인간의 의식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대화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냈다는 평입니다.



소설 전체의 차원에서 다성성은 이른바 ‘거시 대화(great dialogue)’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들이 어떠한 종합이나 타협 없이, 끝까지 긴장을 유지한 채 충돌하는 구조를 뜻합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조시마·알료샤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서로 섞이거나 화해하지 않은 채, 팽팽한 대립 상태로 공존합니다. (이전 포스팅인 '대심문관」 서사의 문학적・철학적・신학적 층위 이해' 글 참조)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작가가 어느 한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개인은 독실한 신자로서 무신론을 논파하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설의 미학적 구조 안에서 이반의 논리는 조시마의 논리만큼이나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형상화됩니다. 이반과 조시마는 작가의 의식에 종속된 일부가 아니라, 작가로부터 분리되어 서로를 향해 말하고 논쟁하는 대등한 사상-인격들인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신앙이 승리한다고 해석했지만, 바흐찐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서 승리하는 것은 특정 이념이 아닙니다. 승리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최종적 결론에도 수렴되지 않은 채 끝없이 충돌하고 생성되는 ‘대화 그 자체’입니다.



5.

발화(發話)


바흐찐의 다성성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언어 철학, 곧 메타언어학 혹은 초언어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군요(어렵... --;;;). 그는 소쉬르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언어를 추상적인 체계의 '랑그(langue)'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제 삶의 장에서 작동하는 언어의 살아있는 사회적 생명력을 사장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해석학 학습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편 등 참조)



바흐찐은 언어의 실체가 고정불변의 문법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발화(utterance, vyskazyvanie)’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장은 문법적으로 완결된 단위로서 반복 가능하며, 화자와 청자가 특정되지 않아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발화는 언제나 특정한 화자가, 특정한 청자를 향해, 특정한 맥락 속에서 행하는 말입니다. 발화는 일회적이며 응답을 전제로 하고, 화자의 교체에 의해 그 경계가 분명히 구획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흐찐에게 언어생활의 실제 단위는 문장이 아니라 발화입니다. 우리는 문장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발화는 언제나 “이전의 발화들에 대한 응답”이자 동시에 “미래의 응답을 촉발하는 기획”입니다. 따라서 어떤 발화도 태초의 말일 수 없으며, 모든 언어는 이미 말해진 것들과 앞으로 말해질 것들 사이에 놓인 역사적 연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성과가 앞선 거인(위대한 선배)들의 업적 덕분이라며,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고 표현했던것을 상기해 보면 유사한 개념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발화는 본질적으로 누군가를 향합니다. 그것이 '청자 지향성’이라는 설명입니다. 화자는 발화를 구성할 때 항상 청자의 존재를 고려하게 되죠. 청자가 동료인가, 상사인가, 적인가, 혹은 미래의 독자인가에 따라 말의 스타일과 어조가 결정되곤 합니다.


"언어는 화자의 것인 동시에 청자의 것이다.

의미는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이해가 만나는 경계선상에서 발생한다."

_ (바흐찐 서클) 멤버인 V.N. 볼로시노프의 저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에서 인용.


이 개념은 다성성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할 것입니다. 소설 속 인물의 말은 작가의 독백이 아니라, 소설 내의 다른 인물, 작가, 그리고 독자(초-청자, superaddressee, 보다 광범위하거나 잠재적인 의미의 청자까지)를 향한 치열한 지향성을 갖는다는 설명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그토록 고뇌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과 말에 끊임없이 반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라는 얘기죠.



바흐찐에게 있어 '단일한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중앙집권적 국가나 권력이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 허상일 뿐이라는 겁니다. 살아있는 언어는 언제나 이질언어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죠. 언어는 사회적 계급, 직업, 세대, 이념, 유행, 지역에 따라 수천 개의 사회적 방언으로 층위가 나뉘게 된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변호사의 언어, 의사의 언어, 상인의 언어, 학생의 은어, 관료의 문체 등은 각기 다른 세계관과 가치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거죠. 바흐찐은 이를 "언어는 의도들로 가득 차 있다"고 표현합니다. 중립적인 단어는 사전 속에만 존재할 뿐, 현실의 단어는 누군가의 입을 거치며 그 사람의 향기(뉘앙스)가 배어 있다는 얘깁니다.


소설은 이러한 이질언어성을 예술적으로 조직하는 유일한 장르였던 겁니다. 시가 언어의 모호성을 제거하고 단일한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로 통일하려 한다면(바흐찐의 이러한 시/소설 구분은 현대 비평에서 매우 논쟁적이라지만),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언어들을 그대로 끌어들여 충돌시킨다고 본다는 얘깁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귀족의 언어와 하층민의 언어, 관료적 허세의 언어가 뒤섞이는 것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세계들의 상호 조명이었다는 해석이죠.


바흐찐은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 문제』에서 담론을 발화 방식과 의미 구조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정교하게 구분합니다.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유형은 직접적 담론입니다. 이는 화자의 의도가 어떠한 매개나 굴절 없이 곧바로 표현되는 단일한 목소리의 담론으로, 사물이나 사태를 향해 직접적으로 지향됩니다. 작가 자신의 서술, 일반적인 설명문, 명령문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의미의 방향이 비교적 명확하며, 다른 목소리와의 긴장이나 충돌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담론 유형입니다.


둘째 유형은 객관화된 담론입니다. 이는 특정 인물의 언어를 하나의 대표적 말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작가가 인물의 성격, 사회적 위치, 혹은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그 인물의 말을 일종의 ‘대상’으로 삼아 재현한 담론입니다. 리얼리즘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투리나 직업적 말투의 묘사가 대표적인 예로, 표면적으로는 인물의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작가의 관찰과 평가, 일정한 거리 두기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셋째 유형은 이중 목소리 담론입니다. 이는 타자의 말에 대한 화자의 태도가 동시에 포함된 담론으로, 하나의 발화 안에 화자의 의도와 타자의 의도가 함께 공존하거나 서로 충돌하는 구조지닙니다. 패러디, 아이러니, 스타일화, 논쟁적인 고백 등이 이에 해당하며, 겉으로 드러난 말과 그 말에 대한 숨은 평가나 반박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겁니다.


바흐찐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핵심은 바로 이 세 번째 유형, 특히 ‘내적 논쟁’과 ‘숨겨진 논쟁’이 긴장 속에서 얽혀 있는 이중 목소리 담론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인물의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식과 세계관이 끊임없이 맞부딪히는 대화의 장이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바흐찐의 시각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적 언어학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카니발(carnival)


그렇다면 이러한 다성적 상상력과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해방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했을까요? 이전 글에서도 간단히 정리했었던바와 같이 바흐찐은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그 뿌리를 중세와 르네상스의 '카니발' 민중 문화에서 찾는다고 썼습니다.²


중세의 공식 문화(교회, 봉건제)는 엄격한 위계질서, 경건함, 공포, 그리고 불변의 진리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이 모든 공식적 질서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는군요. 광장에서 벌어지는 축제 속에서 왕은 광대가 되고, 광대가 왕이 되는 대관과 탈관의 의식이 행해졌던 겁니다. 이 전복적인 의식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세계의 가변성과 상대성을 드러내는 민중적 감각이었던 것이죠. 카니발의 웃음은 권위적인 모든 것을 조롱하고 지상으로 끌어내려, 그것을 죽임과 동시에 재생시켰다는 설명입니다. 바흐찐은 이를 양가적 웃음이라 불렀더군요.


바흐찐은 카니발의 네 가지 주요 범주를 제시합니다.

자유로운 접촉 즉 계급, 신분, 나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이 첫째이고, 기행 즉 억압되어 있던 인간 본성의 잠재력이 돌출되며,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이 허용된다는 것이 둘째입니다. 아울러 카니발적 부조화의 결합 즉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지혜와 어리석음, 숭고함과 비천함 등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결합한다는 것이 셋째이고, 모독 즉 신성한 권위에 대한 조롱과 신성모독이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바흐찐은 이러한 카니발 정신이 고대의 '소크라테스 대화'와 '메니푸스 풍자'라는 장르를 통해 문학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봤답니다. 메니푸스 풍자는 환상적 여행, 철학적 논쟁, 슬럼가와 천국의 병치, 광기 어린 심리 상태 묘사 등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진리를 찾기 위한 실험의 성격을 띤다고 설명되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에 이 장르의 기억을 되살려 소설의 형식을 혁신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캔들 장면, 부적절한 장소에서의 심오한 철학 논쟁, 광기와 꿈, 분신의 등장 등은 모두 카니발적 요소의 변형이었다는 겁니다. 카니발이 사회적 위계를 무너뜨렸기에, 소설 속에서도 작가(신/왕)와 주인공(피조물/신민)의 위계가 무너지고 대등한 대화가 가능해졌던 겁니다. 즉, 카니발은 다성성이 피어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7.

정리를 해보면...


미하일 바흐찐의 다성성 이론은 단순한 소설 작법론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이 유일한 주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객체다"라는 독백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던 겁니다. 독백주의는 문학 내에서는 폐쇄적인 텍스트를 낳고, 정치적으로는 전체주의를, 사회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낳았던 겁니다.


바흐찐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확합니다. "나는 타자 없이는 나일 수 없다."나의 의식, 나의 언어, 나의 존재 자체가 이미 타자들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는 타자에게 응답함으로써만 비로소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타인의 의식을 사물화 하지 않고 온전한 주체로 대우하는 최고의 윤리적 모델을 미학적으로 완성해 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AI로 상징되는 오늘의 현대성은 바흐찐적 통찰을 더욱 절실하게 요청합니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은 수많은 목소리가 분출되는 다성적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확증 편향과 에코 챔버에 의해 ‘파편화된 독백들의 집합소’로 변질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경청과 대화보다는 자기주장의 과잉과 타자에 대한 조롱이 난무하는 시대에, "진리는 개별 의식 안에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바흐찐의 명제는 혐오와 단절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윤리적 나침반이 되는 듯합니다.


세계는 미완결 상태이며, ‘마지막 말’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답니다. 이러한 바흐찐의 다성성은 우리에게도 그 끝나지 않은 대화 속으로, 타자의 낯선 목소리 곁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숙고해 봐야 할 바흐찐의 도전입니다.




참고 자료

-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문제', 바흐찐, 중앙대학교출판부, 2011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엡스키, 민음사, 2007

- '세 죽음(Three Deaths)', 톨스토이, 올리버북스 이북, 2022

- 기타 아래 인용들



1)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세 죽음」의 이해


톨스토이는 교훈적이며 서사 중심적인 작가로서, 대체로 단선적인 서술 방식을 취합니다. 「세 죽음」 또한 이러한 경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장면에서 발생하며, 고통받는 인물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는 물질적 교환뿐입니다. 죽어가는 농부는 죽어가는 귀족 여인의 마부에게 자신의 신발을 건네고, 마부는 농부의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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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과정 어디에도 의식의 공유는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농부의 죽음이나 나무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총체적 인식은 오직 신과 같은 전지적 시점을 지닌 작가에게만 허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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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문자 그대로이자 주제적으로 ‘종결’을 의미하며, 인물들은 이미 죽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죽음들은 작가와 독자를 위해 기능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죽음을 통해 인물들의 삶을 요약적으로 이해하며, 각기 다른 죽음의 양상—시골 여관에서 밤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는 농부, 건강 문제로 남편과 가족을 떠나 영지에 고립된 채 죽음을 맞는 귀족 여인—은 등장인물 자신이 아니라 독자에게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입니다. 세 사람의 죽음은 서로를 비추지만, 그 조응은 오직 작가의 특권적 시점에서만 가능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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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했을까요.


만약 도스토예프스키였다면, 그는 마부와 나무의 삶과 죽음을 귀족 여인의 시야와 의식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며, 동시에 귀족 여인의 삶을 마부의 시야와 의식 속에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작가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모든 본질적인 것들을 함께 보고 알게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작가가 소유한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본질적 잉여분’도 자신에게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귀족 여인의 진실과 마부의 진실은 정면으로 충돌하며, 그들은 대화적으로 접촉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단어들 속에는 작가의 순수한 억양뿐 아니라 귀족 여인과 마부의 억양 또한 함께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각 단어는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하는 이중성의 장이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의 논증, 하나의 미시적 대화가 발생하고, 동시에 더 거대한 대화의 메아리가 공명했을 것입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세 죽음」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식이 인간 형상의 지배적이고 완전하며 자율적인 의식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그의 세계에서, 죽음은 삶을 종결하고 의미를 확정짓는 사건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죽음은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닫히지 않는 대화의 한 국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단어들 속에는 작가의 순수한 억양뿐만 아니라 귀족 여성과 마부의 억양도 들릴 것입니다. 즉, 단어들은 이중적인 목소리 가지며, 각 단어에는 하나의 논증(미시적 대화)이 울려 퍼지고, 거대한 대화의 메아리가 들릴 것입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세 죽음」을 묘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의식이 인간 이미지의 지배적이고 완전하고 자율적인 의식들의 상호작용이 근본적인 사건인 그의 세계에서 죽음은 삶을 종결짓고 명확히 하는 어떤 것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하일 바흐찐,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 중에서)


_ 위 이야기는 gildedgreen.com의 내용을 재인용한 것입니다.




2) 카니발적 이미지에 대한 참고 사항

‘카니발’은 미하일 바흐찐이 그의 저서 『라블레와 그의 세계』(1968)에서 본격적으로 제시한 핵심 개념입니다. 이 책에서 바흐찐은 16세기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1532–1564)를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라블레의 대표작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의 모험을 희극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입니다.


바흐찐은 이 저서를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세계 문학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라블레만큼 인기가 없고, 이해받지 못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는 드물다.”
그에 따르면 라블레의 글은 희극적이고 기괴하며 과장된 신체 이미지로 가득 차 있고, 민속적 삶의 에너지와 집단적 웃음을 적극적으로 찬양합니다. 바흐찐은 이를 “중세 봉건 문화의 공식적이고 진지한 어조에 맞서는, 유머러스한 형식과 표현으로 가득 찬 무한한 세계”라고 평가합니다.


라블레의 글은 특히 중세 문화 속에서 카니발이 지녔던 특성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카니발은 일 년 중 거의 유일하게 흥청망청 즐길 수 있도록 허용된 시기였습니다. 이는 농민들이 나머지 시간 동안 노동에 종사해야 했기 때문에,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일정한 해방의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 아래 성립된 축제였습니다. 바흐찐이 인용한 1444년 한 신학대학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포도주 통은 가끔씩 열어 공기를 통하게 하지 않으면 결국 터지고 만다.” (방찬혁, 「바케트의 극에 나타난 카니발적 웃음」, 2008, 『영어권문화연구』 발표자료 참조)


이처럼 카니발은 연중 지속되던 엄격한 사회 질서를 일시적으로 전복하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예외의 시간입니다. 이 시기에는 위계와 권력 관계가 뒤집히는 상황 자체가 축하의 대상이 되며, 기존 질서의 신성함은 웃음 속에서 해체됩니다. 바흐찐이 말하는 ‘카니발적 이미지’란, 이러한 축제적 전통에 참여하면서도, 그 웃음이 지닌 전복적 잠재력—권력을 실제로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표현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니발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역할극과 역할 전도: 농민은 왕처럼 옷을 입고, 왕은 농민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사회적 위계는 잠정적으로 무효화됩니다.

옷차림의 변화: 일상의 정체성을 벗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잠시 ‘변신’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웃음: 권위자를 향한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조롱의 웃음이 중심을 이룹니다.

공식성에 대한 희화화: 대중의 저속한 언어와 왕이나 교회의 공식 언어가 대비되고, 장난스러움과 진지함, 대화적인 다성적 목소리와 권력의 단일한 독백적 목소리가 충돌합니다. 더럽고 불쾌한 것과 깨끗하고 고상한 것의 대비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카니발적 세계에서 웃음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의 인식 방식이자 비판적 사유의 형식입니다.


_ longwood.edu의 글을 재구성하여 작성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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