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국수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_탈라리코의 짱돌

텍사스주 하원의원 제임스 탈라리코의 행보를 통해 본 그리스도 사랑의 테제

by KEN

그리스도교의 본질 vs. 기독교 국수주의 — 제임스 탈라리코의 테제


"기독교 국수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요즘은 전쟁이 점점 일상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왜곡된 신념이 어떻게 전 세계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여러 장면을 통해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불안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 정치인이 던진 한마디가 예상 밖의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파장은 기독교계 내부를 넘어 미국 정치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미국 정치 지형은 단순한 정책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 듯합니다. 점점 더 신학적이고 종교 철학적인 논쟁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026년 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제임스 탈라리코 하원의원의 행보는 이러한 갈등의 중심을 드러내는 사례로 보입니다. 장로교 신학생이기도 한 그는 “기독교 국수주의Christian Nationalism는 기독교가 아니다”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며, 복음이 정치 권력의 도구로 소비되는 현실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주제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탈라리코의 선언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기독교 국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그리스도교의 근본 원리와 어디에서, 어떻게 어긋나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한 사람의 미국인의 발언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계에게도 과연 어떤 물음을 던질 것인가 궁금해지는 장면입니다.




1.

제임스 탈라리코


제임스 탈라리코의 등장은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신앙 기반의 진보 정치’를 전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개인적 영역에만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보수 진영이 추진하는 기독교 국수주의적 법안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는 흔히 ‘사랑의 정치’로 요약되는데,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핵심 원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탈라리코는 장로교 신학생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텍사스주 의회에서 공립학교에 십계명 게시를 의무화하려는 법안이나, 훈련받지 않은 목회자를 학교 상담사chaplain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강하게 반대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정치는 단순한 권력 경쟁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의 관점에서 신앙은 배타적 국수주의가 아니라, 공적 정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탈라리코의 정치 신학 경향을 이해하려면, 그의 주요 정책 입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논리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보다 선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기독교 국수주의 비판입니다. 그는 “권력 숭배는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기독교 신정국가를 세우라고 명령한 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신앙을 국가 권력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둘째, 공립학교 십계명 게시 반대입니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신학적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는 “예수는 내 종교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고 말하며, 신앙을 강요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셋째, 저소득층과 복지 정책에 대한 입장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성서적 원리를 강조합니다. 이웃 사랑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공공 정책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넷째, LGBTQ+와 소수자 권리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닌 존재이며, 보편적 존엄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거룩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다”는 표현이 그 핵심을 잘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근거로, 사랑은 경계를 넘어서는 환대라고 설명합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와 다르게 기도하고, 다르게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겉으로는 기독교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서는 복음의 핵심인 자기 비움Kenosis과 희생적 사랑을 권력에 대한 의지, 곧 ‘힘의 논리’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지점을 가장 근본적인 왜곡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2.

기독교 국수주의


기독교 국수주의는 단순히 기독교인이 애국심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 정체성과 결합시키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사회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 흐름은 미국이 본래 기독교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일종의 심층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 국가의 기원과 사명을 특정 종교적 정체성과 동일시하려는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적 주장을 포함합니다.

- 국가적 선택 선민 사상 — 미국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에 있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믿음.

- 권력의 언약 — 기독교 국수주 의에서의 언약은 도덕적 책임보다는 권력의 보호를 기반으로 함. 하나님을 도덕적 심판자가 아닌 '강력한 보호자'로 인식하는 것.

- 배타성과 위협 인식 — 비기독교인, 비백인, 이민자들의 존재를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위협으로 간주.

- 도미니언리즘 —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모든 영역(가족, 종교, 교육, 미디어, 예술, 경제, 정부)을 통제해야 한다는 '칠산 원칙Seven Mountain Mandate'을 추구함.


기독교 국수주의라고 해서 하나의 단일한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주의적 도미니언리즘입니다. 이는 이른바 신사도 개혁 운동(NAR)과 연결되는데, ‘칠산 원칙’을 통해 사회의 모든 영역—정치, 교육, 문화, 미디어 등—을 기독교적 통치 아래 두어야 한다는 비전을 지닙니다. 단순한 신앙 운동을 넘어 사회 전반의 장악과 통제를 목표로 합니다.


둘째, 칼뱅주의적 국수주의입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정한 변형, 예컨대 스티븐 울프 등 일부 사상가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민족적 순수성, 가부장적 질서, 이민 반대 등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국가를 세우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셋째, 가톨릭 통합주의입니다. 이는 가톨릭 도덕 신학을 국가 차원에서 강제하려는 흐름으로, 국가 정책을 교회의 권위 아래 통합하려는 방향성을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상대화하고, 공적 영역을 교회적 질서에 종속시키려는 성격이 강합니다.


넷째, 백인 기독교 국수주의입니다. 이는 인종주의와 복음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백인 개신교 정체성을 미국 시민권의 핵심 요소로 설정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여기서는 신앙과 인종, 그리고 국가 정체성이 긴밀히 얽혀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국수주의는 하나의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학적 뿌리와 정치적 목표를 지닌 여러 흐름이 교차하며 형성된 복합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성서의 언어를 차용하지만, 그 본질은 타자를 향한 환대가 아닌 자아와 집단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종교적 자기도취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3.

권력의 종교 vs. 도덕의 종교


탈라리코의 분석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기독교 국수주의를 ‘권력의 종교Religion of Power’라고 규정한 점입니다. 그는 이것이 정통 그리스도교가 지향해 온 ‘도덕의 종교Religion of Morality’와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봅니다.


먼저, 그가 말하는 ‘권력의 종교’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진리와 사랑의 근원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적을 물리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습도 왜곡됩니다. 탈라리코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는 마치 “총을 들고, 소수자를 비난하며, 과학을 부정하고, 돈을 사랑하는 파시스트”처럼 재구성됩니다. 복음은 본래의 급진성을 잃고 ‘길들여진domesticated’ 상태가 되어, 기존 권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전이는 하나의 단순한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정체성에 정치적 권력욕이 결합하면, 결국 우상숭배적 국수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정체성 + 정치적 권력욕 = 우상숭배적 국수주의


이 지점에서 종교는 더 이상 인간을 성찰하게 하거나 윤리적 삶을 북돋는 힘이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고 배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기술’로 변질됩니다.


이에 비해 탈라리코가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자를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며, 스스로를 비우는 것”입니다. 핵심은 권력을 쟁취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권력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고 약자의 편에 서는 데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를 “신학적 무관심 속에 있는 신자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무신론자에 더 가까운 존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신앙의 척도는 교리적 완고함이나 집단적 동일성에 있지 않고, 자비와 사랑을 실제로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과 지배욕


기독교 국수주의를 종교 철학적으로 비판함에 있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핵심적인 준거틀을 제공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 역사를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이라는 두 사랑의 대립으로 설명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들었다"고 정의합니다.

- 지상의 도성 —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amor sui에 의해 형성되며, 지배욕libido dominandi에 의해 통치된다.

- 하나님의 도성 — 자기를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하나님 사랑amor Dei에 의해 형성되며, 겸손과 평화, 정의를 지향한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내면의 동기는 지상의 도성의 핵심인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에 물리적으로 건설하려는 시도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경고했던 "잠정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라리코가 지적한 "권력 숭배"는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지배욕과 정확히 겹쳐집니다. 기독교 국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곧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서 진정한 정의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랑"에서 나오며, 국가 권력이 신앙의 강제를 시도할 때 그것은 이미 정의로운 국가가 아닌 "강도 떼"에 불과하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의 이름을 부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섬기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5.

바르멘 선언과 국가의 전제주의에 대한 저항


현대 기독교 국수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신학적 안티테제는 1934년 독일의 '바르멘 선언'일 것입니다. 당시 나치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굴복한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에 맞서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주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바르멘 선언은 칼 바르트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국가 권력이 교회의 복음을 가두거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제1항: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이다. 국가나 역사적 인물(히틀러 등)은 계시가 될 수 없다.

제2항: 삶의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국가 권력에 전적으로 양도될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5항: 국가는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는 제한된 과업을 가질 뿐이며, 인간 삶의 유일하고 전적인 질서가 될 수 없다.


바르멘 선언의 논리와 기독교 국수주의 비판의 연관성을 아래와 같습니다.

이 표는 바르멘 선언의 핵심 명제들을 오늘날 기독교 국수주의에 비추어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내용을 조금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명제는 어떤 국가나 이념, 헌법, 지도자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면, ‘미국 우선주의’나 ‘헌법의 신성화’ 같은 태도 역시 일종의 우상숭배로 비판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둘째, “교회는 국가의 기관이 될 수 없다.”

교회가 국가 권력의 도구가 되거나, 국가가 교회를 이용하는 구조는 신앙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따라서 정교분리는 단순한 정치 원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율성과 교회의 비판적 기능을 지키기 위한 신학적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직무는 지배가 아니라 봉사이다.”

교회는 세상을 통치하는 기관이 아니라 섬기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도자(Führer) 숭배나 권위주의적 통제 구조를 거부하는 신학적 근거가 됩니다. 신앙은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섬김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쇠사슬에 매이지 않는다.”

복음은 어떤 특정 정당이나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 없습니다. 특정 정치 세력이 복음을 독점하거나 자신들의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이미 복음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바르멘 선언은 단지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국수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 기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탈라리코의 주장은 현대판 바르멘 선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신앙의 독립성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국가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6.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의 신학


기독교 국수주의가 갖는 배타적 성격에 대해 현대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Exclusion를 죄의 핵심'으로 규정하며 '포용Embrace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볼프의 설명에 따르면, 배제란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자아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타자를 악마화하거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폭력적 행위입니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이민자나 타 종교인, 소수자들을 ‘미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설정하면서 집단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까지 품으신 예수의 사랑과는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볼프가 말하는 ‘포용’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팔을 벌리는 것입니다. 타자의 부재를 아파하며, 그 존재를 기꺼이 맞이하려는 초대의 자세입니다.

다음은 기다림입니다. 상대를 억지로 끌어들이거나 조종하지 않고, 그의 응답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그다음은 팔을 닫는 것, 곧 서로를 끌어안는 상호적 만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팔을 여는 것입니다. 포용이 소유나 흡수로 변질되지 않도록, 타자의 고유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탈라리코가 말하는 ‘이웃 사랑’은 바로 이런 포용의 역동성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그는 미국의 진정한 약속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이른바 멜팅팟에 있다고 보며,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합니다. 그의 주장은 사랑을 사적 감정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적 관계와 정책의 차원으로까지 넓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우상숭배로서의 국수주의와 진정한 예배


기독교 국수주의를 두고 “하나님 대신 국가를 예배하는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윌리엄 캐버너는 특히, 국수주의가 복음의 언어를 빌려 국가에 대한 ‘희생적 헌신’을 요구함으로써 신앙을 국가의 하부 구조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궁극적 충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이 우상숭배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징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의 폭력이나 전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쉽게 정당화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거룩한 행위처럼 숭상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셋째, 예배의 공간에서 성서의 메시지보다 국기와 같은 국가적 상징이 더 중심에 놓여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탈라리코는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이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의사당을 점거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십계명을 강요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 숭배”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십자가를 국수주의로부터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8.

마무리하며...

— 그리스도교의 본질 회복을 위한 제언


제임스 탈라리코가 말한 “기독교 국수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단순히 미국 정치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경고처럼 들립니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복음을 국가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만들고,

사랑의 종교를 지배의 도구로 바꾸어 놓았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문제를 정리해 보면 몇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존재론적 단절의 문제입니다. 기독교 국수주의는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힘과 정복의 논리, 다시 말해 ‘가이사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 우상숭배적 성격입니다. 국가 정체성을 신앙과 동일시하는 순간, 그것은 성서가 엄격히 경계해 온 우상숭배의 현대적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환대의 회복이라는 과제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은 내부 결속을 위한 배타성에 있지 않고, 오히려 타자를 향해 팔을 벌리는 포용과 환대에 있다는 점입니다.


넷째, 공적 신앙의 역할에 대한 성찰입니다. 신앙은 정치를 장악하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정의와 평화, 사랑이라는 가치를 통해 공론장을 비판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예언자적 목소리로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탈라리코의 테제는 그저그런 선거 구호를 넘어, 우리가 믿는 신이 과연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권력을 숭배하는 ‘지상의 도성’의 종교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도성’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 선택이 현대 기독교의 방향을 가를지도 모릅니다.


탈라리코는 그 답을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와 다르게 기도하고, 다르게 투표하고, 다르게 살아가는 이웃까지도 품는, 넓은 팔 벌림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주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서의 삶이, 교회가,

성경의 저자들이 신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 하나님 사랑(십자가의 수직적 의미)

- 이웃 사랑(십자가의 수평적 의미)의 정신을

망각하고는 있는 것 아닌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의 종교로의 회귀를 촉구합니다.



ps.

지난 2026년 2월 17일.

CBS 레이트 쇼에 출연한 제임스의 인터뷰가 당일 방영 예정이었으나, 당일 쇼가 결방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외압 의혹이 일었습니다. CBS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이미 갑작스런 레이트 쇼 결방 결정에 트럼프 정부의 영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이를 믿는 이들이 많지 않았었습니다.


아래 영상은 당시 해당 미방영분을 유튜브에 올려 둔 것입니다.

Rep. James Talarico On Confronting Christian Nationalism, And Strange Days In The Texas Legisl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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