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논쟁 및 지향

눈과 생각 앞에 끼운 렌즈의 유무와 촛점 정렬

by KEN

기독인의

세상을 대하는 안경, 그 관점과 태도 혹은 여정에 관하여…



0.


현대 한국 기독교 지성사에서 ‘기독교 세계관’만큼 깊은 감동과 동시에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킨 개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소개된 기독교 세계관은 단순히 몇 가지 신학적 명제를 정리한 사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새롭게 교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형성하려는 하나의 지적·실천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40여 년이 지난 오늘, 한국 교회와 학계 안에서는 이 기독교 세계관이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어느 순간 근본주의적 독단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지적 위기의 상황에서 기독교 철학자 강영안 교수와 신학자 전성민 교수의 관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을 단순한 ‘교리적 체계’에서 찾기보다 ‘일상을 형성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보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주제는 최근 전개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특히 강영안의 철학적 성찰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떤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질 수 있는지를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주, 강영한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무척 조심스러워(꺼려)합니다만, 편의상 용어 자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정리합니다) 1)



1.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전개 역사 및 위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한국의 복음주의권 청년들과 지성인들에게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매우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이 운동을 이끌었던 주요한 지적 자원은 아브라함 카이퍼헤르만 도예베르트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전통이었습니다.


연대별 운동의 특징과 흐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역사는 크게 도입기, 확장기, 그리고 침체 및 비판기라는 세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973년부터 2024년까지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한 전성민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운동은 단일한 형태로 지속된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요구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성격과 강조점이 계속 변화해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성민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기억과 모색⟫(IVP)을 통해 본 주요 흐름 요약

존재의 위기와 비판의 핵심

최근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직면한 위기는 단순히 지지자 수가 감소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의 도덕성과 지적 정당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기독교 세계관의 주류 세력이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젊은 지구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세계관 담론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결국 기독교 세계관이 세상을 밝히는 성찰의 빛이라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요새화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 제기로 이어집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세대에게 ‘세계관’이라는 담론이 거의 전달되지 않았거나, 설령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시대착오적인 교조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심각한 세대적 공백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일부 비판적 시각 속에서 ‘이미 수명을 다한 운동’ 혹은 ‘해체되어야 할 우상’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게 된 상황입니다.


[참고]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는 도발적 주장을 하기에 이른 장준식 목사

미국 세화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장준식 목사는 2026년 3월 5일경 페이스북과 블로그(bibleodyssey.tistory.com)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철학의 체계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몇 가지 핵심 포인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체계화의 문제입니다. 장 목사는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세계를 폐쇄적이고 총체적인 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이러한 체계화는 결국 분류와 위계화를 낳고, 정치적 판단을 강화하며, 복음이 지닌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둘째, 문명 프로젝트로의 변질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적 사회, 국가, 문화 질서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등장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문명 재건 프로젝트의 본부처럼 기능하게 된다는 비판입니다.

셋째, 대립을 조장하는 이분법입니다. 기독교적/비기독교적이라는 구도를 통해 세계를 구분하게 되면, 결국 신앙의 분별이 전선의 논리로 변하고 적대적 대립을 강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 목사는 이에 대해 복음의 본래 메시지는 적대와 전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화해를 부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넷째, 대안으로서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어떤 체계나 이론이 아니라 복음, 하나님의 사건,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는 바르멘 선언을 예로 들며, 교회는 어떤 사상 체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모든 우상을 깨뜨리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장준식 목사의 문제 제기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독교를 길들이고 약화시키는 틀로 작동할 수 있다는 비판과 함께, 교회가 다시 제자됨과 성령의 자유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2.

강영안의 철학적 기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칼빈 신학교 교수인 강영안은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를 제시합니다. 그는 칸트와 레비나스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기독교 세계관을 단순히 고정된 ‘지식의 체계’로 이해하기보다,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형성의 여정’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면

강영안은 현대 지성계에서 기독교 유신론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도전 가운데 하나를 '자연주의Naturalism'에서 찾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주의는 '물리적 현실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며, 과학만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한 도구라고 믿는 강한 형태의 무신론적 태도'를 전제합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우주에 어떠한 의도나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만, 강영안은 오히려 기독교 유신론이 "존재하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으며 실재하는 진리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는 '진리'를 인간의 사고가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바로 그 실재하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계관의 형성

강영안에게 있어 세계관은 결국 ‘공부’를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공부는 단순히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질문하고, 책임지며, 사랑으로 응답하는 한 인간의 생애 전체에 걸친 형성의 여정”입니다.


먼저 질문으로서의 공부입니다.

공부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과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겸손하게 경청하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알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의 전통을 계승합니다.


다음으로 책임으로서의 공부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지식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결국 공허해지고 맙니다. 따라서 배움이란 단순한 지적 활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윤리적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형성Bildung으로서의 공부입니다.

공부란 단순히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 여부는 얼마나 정교한 이론을 갖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지혜의 감수성을 회복하여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영안의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믿음의 구성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토대


기독교 세계관이 실제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근원적인 동력이 ‘믿음’에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강영안은 그의 저서 『믿는다는 것』에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참여하는 전 인격적인 행위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전 인격적 신앙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곧 세계관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정·의의 통합적

강영안은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축소하는 '현대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와, 반대로 신앙을 이성적 판단으로만 환원하려는 '이성주의'를 동시에 경계합니다.


그는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전통에 근거하여 신앙의 구조를 세 가지 요소로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는 지식Notitia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알아듣는 단계로, 신앙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용을 가진 인식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동의Assensus입니다. 이는 이해한 복음의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셋째는 신뢰Fiducia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인정에 머무르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의탁하는 인격적 신뢰의 단계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믿음은 머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가 참여'하는 전인적 행위가 되며, 동시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이해됩니다.


강영안은 이 점을 강조하며 “강요된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믿음 속에서 인간은 참된 개체성과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타자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인격적 만남에서 시작되는 삶의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만으로...

강영안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대상이 어떤 교리 체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사물이나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시며, 스스로 판단하시고 행동하시는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뢰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예를 들어 맘몬이나 특정 이데올로기—에 두게 되는 순간, 기독교 세계관은 곧바로 우상으로 변질될 위험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영안은 기독교 세계관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우상을 깨뜨리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4.

일상의 철학 — 기독교 세계관의 '구체적 현장성'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 속에서, 강영안이 제시한 가장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는 ‘일상’을 신학적·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이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적 투쟁 속에서만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 먹고 자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실제로 드러나고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상의 의미와 적용

강영안은 일상이 가진 다섯 가지 특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물과 과제로서의 일상

강영안은 인간의 삶을 ‘주어진 선물Gabe’인 동시에 ‘살아내어야 할 과제Aufgabe’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 이전에 이미 삶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국 이 선물로 주어진 삶에 대해 '성실하게 응답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세계관은 어떤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삶과 그것을 책임 있게 살아내야 하는 과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는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감사를 회복하고 주어진 삶의 자리—가정과 일터, 사회와 공동체—를 책임 있게 가꾸어 가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 중심 윤리와 실천하는 태도

강영안의 일상 철학은 특히 ‘먹는 행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집니다. 그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단순한 생리적 행위가 아니라, 다른 생명—곧 타자의 죽음을 바탕으로 나의 삶이 유지된다는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일상은 결국 타자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 위에 세워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타자 중심의 윤리로 확장됩니다. 내가 배고프면 반드시 먹어야 하듯이, 타인 역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윤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강영안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나의 밥상이 있다면 타인의 밥상도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거대한 이론이나 추상적인 담론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타인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삶의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강영안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5.

전성민의 평화의 세계관과 강영안의 응답


최근의 논쟁 속에서 전성민 교수VIEW(기독교세계관대학원대학교)기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드러낸 한계를 넘어설 하나의 대안으로 ‘평화의 세계관’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은 한편으로 강영안이 강조해 온 일상 중심의 철학적 접근과 궤를 같이하면서, 동시에 그 틀을 넘어 보다 구체적인 실천적 지표와 방향을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성민의 '세계관적 성경 읽기'와 5대 지표

전성민은 기독교 세계관이 스스로를 ‘최고의 체계’로 간주하는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특정한 철학적 체계를 절대화하기보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세계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대안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지성 너머의 욕망의 제자도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적 체계를 정교하게 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욕망과 삶의 방향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도록 형성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중심이 아닌 경계의 삶입니다. 그는 기독교가 사회의 기득권적 중심에 자리 잡기보다, 소외된 이들과 타자들이 만나는 경계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셋째, 혐오를 이기는 환대의 복음입니다. 민족, 인종, 성적 지향 등 다양한 경계를 넘어 타자를 환대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고 그는 말합니다.


넷째,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입니다. 기독교가 진리를 고백한다 하더라도,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과 겸손하게 대화하고 배우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교회 너머 인류를 향한 사명입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단순히 좁은 의미의 교회 부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번영과 창조 세계의 보전을 향해 책임 있게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강영안의 '온유와 두려움'의 변증

강영안 역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일정한 갈등과 저항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강한 반기독교 정서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온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3:15–16을 인용하며,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대답할 준비를 하되, 그 방식은 반드시 ‘온유와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가 그리는 종교 다원 사회 속 그리스도인의 모습“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예의를 지니면서도,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독단적인 선언이나 이념적 투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신사적인 태도 속에서 복음의 열매인 선함과 의로움을 삶으로 드러내는 실천적 지혜, 곧 정행Orthopraxis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기독교 세계관의 미래 — 공동선과 온전한 인간의 형성


강영안 교수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론이 얼마나 정교하고 정합적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삶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열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서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성취를 강하게 강조하지만, 강영안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지향해야 할 사회는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은사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적 책임을 잃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각 개인의 은사가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의 목적과 성도의 훈련

강영안은 목회의 목적을 성도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훈련하여 다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적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양육과 훈련, 그리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바로 그 일상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세계관은 교회라는 닫힌 울타리 안에 머무는 사고 체계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려는 끊임없는 실천적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지향점 요약 정리



7.

맺으며...


최근의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이 운동이 더 이상 과거의 이념적 승리주의나 교조주의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 여부는 그것이 세상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형성되어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강영안—전성민 교수의 성찰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의 체계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책임지며 살아내야 하는 삶의 길로 이동시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토대로, 타자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자신의 밥상을 타자와 나누는 일상적 정의를 실천하는 지혜입니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형성’으로서만 그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지적·영적 위기는 기독교 세계관을 폐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일상의 지평으로 다시 가져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 속에서 그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극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박제된 유물처럼 보존되어야 할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살아 있는 서사여야 합니다.



[참고자료]

1.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강영안/최종원, 복있는사람, 2026.

2. ⟪믿는다는 것⟫ 강영안, 복있는사람, 2018.

3. ⟪세계관적 성경읽기⟫ 전성민, 성서유니온, 2021.

4.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 기억과 모색⟫ 전성민, IVP, 2025.

5.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 장준식, 블로그, 2026.




주 1) 강영안은 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 사용을 꺼려하는가?


강영안 교수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선호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유는 그 용어가 한국 교회 안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성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용어의 사용을 경계하거나 꺼려하는 결정적인 이유 4가지를 정리해봅니다.


① '세계관'의 이념화와 배타성

강영안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이 자칫 타자를 정죄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논리적 무기'로 변질되는 것을 가장 우려합니다.

- 세계관이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리다"는 식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가 될 때, 기독교는 세상과 소통하기보다 담을 쌓게 됩니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연구한 철학자로서, 그는 '나'의 체계(세계관)로 '타자'를 규정하고 흡수해버리는 폭력성을 경계합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이 '환대'가 아닌 '배제'의 도구가 되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공식Formula'에 갇힌 빈약한 사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핵심 구호인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틀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안경'으로 고착화된 점을 지적합니다.

- 복잡한 세상의 현상(예술, 과학, 고통 등)을 이 세 가지 공식에 끼워 맞춰 너무 쉽게 답을 내버리는 지적인 게으름을 경계합니다.

- 성경은 풍성한 이야기인데, 이를 몇 가지 명제로 요약해버리면 성경이 가진 역동성과 신비가 사라진다고 봅니다.

'지성주의'의 함정

그는 세계관을 단순히 '머릿속의 생각'이나 '관점(View)'으로만 정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기"만 강조하다 보니, "기독교적으로 살기(몸의 습관)"가 소홀해졌다는 것입니다. - 제임스 K.A.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보다 '사랑하는 존재(Erotic being)'로 봅니다. 세계관은 지적 체계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습관이 향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용어의 정체(Static)된 느낌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정적이고 고정된 이미지를 꺼려합니다.

- 세계관은 한 번 장착하면 끝나는 '안경'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수정되고, 회의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Process이어야 합니다.

- 그는 '세계관'이라는 명사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태도'라는 동사적 의미를 더 선호합니다.


강영안 교수가 이 용어를 꺼려하는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이 '겸손한 경청'과 '윤리적 책임'을 잃어버리고, '지적인 교만'과 '종교적 배타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 대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 혹은 '제자도'라는 표현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기독교 국수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_탈라리코의 짱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