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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Jan 17. 2020

노인의 스탠스

어떤 모습으로 늙은 채 있을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 내 세월의 흐름에 대해 '자라고 있다'는 표현보다 '늙어 간다'는 표현을 쓴다. 학부 때 발달 관련 수업을 들었을 때 '19세 이후로 인간의 육체는 퇴행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 걸 들었다. 전 인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걸 보면 실제로도 내게 '늙어 가고 있다'는 표현을 써도 될 것이다. 물론 나는 늙었다는 말이 아직 어색한 젊은이다. 그러나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제는 도서관에 가서 신착코너에 가 새로 나온 책을 둘러봤다. 그러다 어느 노인이 쓴 수필을 읽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고 20세 언저리에 소설가로 등단을 앞두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의 풍파로 북의 의용군이 되었다고 했다. 북에서부터 탈출하여 다시 남한으로 왔으나 비극은 찾아와 또다시 징집돼 국군으로 상대진영에 맞섰다. 전후엔 그렇게 문학을 하고 싶었으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냥 다른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고. 60세가 되자 아직 젊은데도 일터에서 쫓겨나 노인네 취급을 받았다 했다. 50년대 이후 전후문학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이념의 갈등이 파괴시킨 한 인간의 생애. 안타깝지만 누구도 예외없이 공멸했기에 누가 누굴 구원해줄 수 없는 상황. 



노인은 미처 벼리지 못한 칼날처럼 아주 뭉툭하고 단단한 사람 같았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열패감이 고스란히 그의 글에 녹아 있었다. 그게 아주 낯설었다. 내가 자라면서 알고 지낸 노인들과는 전연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노인은 주로 동네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이념이나 자아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날것의 표현을 쓰자면 내가 아는 노인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안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장비처럼 논에 가서 물을 대고, 때가 오면 파종을 하고, 비료를 주고, 폴대를 세워 식물을 일으킨다. 흘러가듯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내가 아는 노인들은 전부.






허나 수필 속 노인은 60대가 돼 퇴직을 하고서야 본격적으로 마음에 맞는 일을 했다고 한다. 아주 늦었지만 비로소 무언갈 이뤄냈기에 만족스럽다는 뉘앙스였다. 또한, 자신이 나이를 먹는 바람에 후배들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준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계속해서 입증하는 게 그의 소일거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의 말년이었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의 인생에 대해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치판단을 할 주제가 못된다. 아직 그 나이대를 살아보지 않았고 내가 확보한 '노인의 생애'라는 표본은 적다. 다만 피상적인 관점에서 난 노인의 존재가 불편했다. 부작위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 인정에 목말라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은 자신이 겪은 고통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있게 주창하는 사람. 그가 자아실현을 하는 건 개인사상 중요한 일이겠지만, 사회에 있어서는 아닐 수 있다는 걸 그는 모른다.






모두 개개인으로서 충분히 중요한 사람이지만 가끔은 제게만 쏠린 줌을 빼서 객관적으로, 전체적으로 넓게 관망할 필요가 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다"라고 종종 놀리곤 하는데 실제로 늙어서 자의식 과잉이 되면 여러 사람 피곤케 한다.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그걸 판단하는 능력조차 '잘 늙었음'을 반증하는 척도다. 



내가 충분히 늙지 않은 상태로 노년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게 어불성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노년이 되어 취할 스탠스는 그러하다. 부작위, 그리고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것만으로도 여러가지 변주를 통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삶.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여기에는 정서적.금전적인 자원의 충분한 소유 여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존재한다ㅋㅋ) 서른 언저리에 막연히 생각건대 부디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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