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싫어 돌멩이가 되고 싶은 아이에게

서평 <공부공부> : 엄기호

by 랄라라

공부에 바빠 공부를 잃은 이들에게 주는 책이라는 이 책은 작년에 지인에게 선물을 받은 책이다.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에 불은 넣는 능동적인 '함'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함'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 이게 왜 이러지?' 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이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에 의해 촉발된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원래 능동적인 것, 적극적인 것, 뭐.. 이런 것들이 생각 아닌가?

역시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즉, 수동적인 겪음이라는 것 자체를 능동적인 '함'에 의애 튕겨져 나와 겪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것이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 살, 즉 대학을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애와 발달과정에 관해 망상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코로나 19로 원격수업을 하는 기간에도 매일 학교에 나오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다. 그래서 내가 매일 데리고 있으면서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눈다. 축구를 좋아하고 게임을 사랑하는 이 아이는 공부를 지독스럽게 싫어한다. 래포(상호 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음에도 공부 특히 수학을 가르치려면 금방 얼굴은 죽을 상이 된다. 그러면서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과 한숨을 쉬며 말한다.

"차라리 돌멩이로 태어날 걸!!!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부를 해야 해!!!"

짠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하지만, 3학년 과정을 넘어서서 지금은 4학년 과정을 어느 정도 원활하게 하고 있다.

이 아이에게 꿈을 물으면 꿈이 없다고 답한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서일까? 어른들(특히 가족들)이 보여주는 모습에 자신의 미래 모습을 투영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 싫은 걸까?

난 이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 거지?


이글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생애와 발달과정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이야기이다. 어른들은 자녀가 4-5학년이 되면 자기의 꿈, 자아탐색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중 2가 되면 자기의 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면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폭풍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흔히 보수적인 부모는 자녀가 서울대를 가기를 바라고, 진보적인 부모는 자녀가 비판적인 서울대생이 되기를 바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교육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강요하며 구성원 대다수를 패배자로 몰아가고 있는 이 '발전 중심의 사회'를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 전체가 끝장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나는 시 한 편이 있다.

곽재구 시인의 <바닥에서도 아름답게>이다.

<공부 공부>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교육, 이상적인 사회가 왠지 곽재구 시인이 꿈꾸는 세상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풀 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서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서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인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자기 계발은 이미 자기를 파괴하는 논리가 되었다. 이 자기 파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알고 인정해야 한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라는 말은 포기하고 주저앉으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에 넋을 놓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탁월함의 기준을 재능에서 기예로 전환하자는 말이다. 재능에 초점을 맞추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부러워하거나 무리하여 극복하려다 파괴될 뿐이다. 반면 탁월함을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면, 자신을 볼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 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인 일어난다. 무엇인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교사로 살아가다 보면 '나는 재능이 없어요', '나는 머리가 나빠요', '나는 해도 안돼요'라는 아이들의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노력'의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이들이 자유를 가졌으면 한다. 능수능란함이란 자유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며, 그 가능성이 삶을 기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