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츠네 Aug 20. 2021

삼프터 고백은 국룰이 아니다

어느 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그녀

소개팅은 매번 어렵다.

일단 서류전형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자소서도 없이 사진과 숫자로만 당락이 좌우되는 서류전형이기 때문에 흔남인 나로서는 숱한 좌절을 겪곤 한다. 채용시장이 정기적인 것도 아니라서 다음 서류전형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신규채용이 없을 수도 있다). 취업시장만큼이나 얼음장 같은 곳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본선 역시 만만치 않다. 일단 사진과 다른 실물을 보고 실망할 수 있다. 카메라 어플은 사람의 턱을 세모 게 해 주고 사람의 눈을 무척 동그랗게 늘여준다. 화강암 같던 피부가 백옥처럼 변하기도 한다. 필터 가수 매드 몬스터의 제이호가 된 것만 같다. 만나자마자 공기가 무거워졌다면 실제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방증이다. 왜 매드 몬스터도 필터가 벗겨지는 순간, 팬들이 오빠들 몸에 사탄이 깃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외적 영역이 통과되었다고 해도 까다로운 내적 영역이 남아 있다. 너와 나의 교집합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한지 알게 된다.


"퇴근하고 하는 건.. 딱히 없고요. 그냥 누워 있어요. 유튜브 보기도 하고."

열에 여덟의 대답이다. 아아 인간의 삶은 이렇게 색채도 없이 따분하기만 한 걸까. 하루키의 소설 속에 나오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씨가 곧 우리인 것만 같다. 분명 교집합인데 마음의 유대로 이어지지 않는 교집합이다. 너는 어떤 사람일까. 행복할 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울할 땐 무슨 노래를 들을까. 민트 초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옆에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도, 반짝이는 당신의 색깔도, 질문이라는 형태로 되어버리면 식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나 한 번 그리고 너 한 번, 핑퐁처럼 주고받으며 우리는 노력한다. 어쩌면 '몽환의 숲'일지도 모르겠다. 오감을 초월한 육감에 의해 내 짝임을 확인하는 건 아닐까.


오랜만에 삼프터를 했고, 쫑이 났다.

소개팅을 하고 다음번 만남을 애프터 그리고 그 다음번 만남을 삼프터라고 한다. 애프터까지는 예의상 신청할 수도 또 수락할 수도 있지만 삼프터까지 가게 되면 기본적인 호감은 바탕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삼프터 고백이 국룰이라는 소리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룰에 취해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걸 추천한다. 세 번을 보고도 사람의 마음이 연결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두 번째 만남까지의 달콤했던 공기도 세 번째 만남에선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더라. 사람은 육감을 넘어 칠감을 소유한 예민한 동물임을 소개팅 때마다 느낀다. 영화 '식스센스'에서 자신이 이미 죽어버린 유령이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브루스 윌리스는 바보임이 틀림없다. 활활 타오르는 마음도,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도, 말하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 번째에 그녀를 보자마자 5분이 채 안돼서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가 그 전의 마음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잘 지냈어요?"라는 말조차 불편한 마음으로 건네졌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고, 목이 타듯 물컵에 물을 따르고 홀짝 하기를 여러 번. 불편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참고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게 소개팅이다. 독서모임을 진행한 경험으로 적절한 주젯 거리를 찾아 몇 번 던진 뒤 암묵적 합의에 다다른 시간이 지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봤자 소용 없는 것처럼, 마음을 잃은 상대방에게 무슨 손을 써도 소용이 없다. 선조들의 지혜로운 격언은 21세기가 되어서도 적용된다. 왜 내 소개팅까지 적용되는 것이냐고요. 아재 개그라도 던질 걸 그랬다. 예수님이 볶음밥을 한 입 드시더니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그녀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단편 소설이다. 길거리 맞은편 다가오는 한 여자가 그렇게 예쁘지도,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겐 100퍼센트의 그녀임을 직감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그다지 예쁜 여자는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50미터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인 것이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中-


소설처럼 100퍼센트의 그녀를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직 느껴본 적은 없다. 지난 연애도 100퍼센트의 그녀라고 하기엔 부족한 퍼센트에서 서로를 채워나갔던 것 같다. 처음부터 100퍼센트의 그녀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는 지내오면서 70퍼센트였던 상대방도 100퍼센트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 사람의 웃음소리, 깊은 생각, 비슷한 취향에 끌려 남은 퍼센트가 메워지는 것이다. 소개팅에서는 100퍼센트의 그녀를 만나기도, 부족한 퍼센트를 서로 채워나가기도 어렵다. 그래서 소개팅이 열에 한두 번 잘돼도 성공했다고 하는 것일까.


직장인이 되면 '자만추'하기가 어려워진다. '자만추'란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대학교 시절에는 같은 학과, 동아리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매력을 알아가고 만남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그 안에서 만남을 추구한다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로, 소개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동아리 아닌 동호회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곳은 약육강식이 명확한 '동물의 왕국'일 수 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바에야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찾아 동호회든 무엇이든 참여하는 것이 낫다. '소개팅'과 '자만추' 두가지 방법을 병행하는 전략을 세워야겠다. 운명이 될 여러 우연들을 켜켜이 쌓아가야지.

어디선가는 만나지 않을까, 100퍼센트로 채워나갈 수 있는 상대방을.
이전 02화 차와 집은 없고 학자금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