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dust May 12. 2021

카피, 잘 써지세요?

네니오.


최근 어떤 면접에서 대표님이 카피가 잘 써지냐고 물었다.


그래서 한 번에 써질 때도 있고, 오래도록 있다가 마침내 써질 때도 있다고 답했더니 그녀는 웃음을 떠뜨렸다. 아니, 10년씩 일한 카피라이터도 카피 쓰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단번에 잘 써진다고 답하는 게…

라고 말끝을 흐리며 눈물까지 닦아내고 웃었다.


카피 쓰는 건 당연히 어렵다. 너무 어려워서 하루종일 모니터를 노려보아도 문장 하나를 쓰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적은 글자가 많았는데 결국엔 빈 페이지여서 누군가 내 모니터를 보고 월급루팡한다고 생각할까 걱정한 적도 많다.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어느 시점부터는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회의에 들고가기 전까진 내 모니터 안에서 나만 보는 거니까 부끄러워도 일단 다 꺼내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 번에 쓸 때가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써질 때가 있다. 그렇게 무언가 써지면 거기서 또 걸러내고 고치고 다듬어서 0개, 많으면 두 개 이렇게 겨우겨우 나오는 게 카피라는 걸 이제는 나도 안다.


나는 카피가 써진다고 했지 잘 팔린다고는 안 했다. 팔리는 카피를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어쨌거나 이 일은 약속된 회의시간까지 내 몫을 써가야 하는 일이다. 안 팔릴까봐 지우고 고치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이것저것 가져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뭐라도 쓰기 위해 필요한 건 어떻게든 시간 내에 해내겠다는 의지, 머릿 속에만 맴도는 것들을 종이 위에 적어내는 용기다. 거창해보이지만 그 때 나에겐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지금이라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그러니까 면접 때 나는, 어떻게든 내 몫을 하기 위해 두려움을 곧잘 이겨낸다는 말을 했던 거다. 부연설명을 했어야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어쨌거나 ‘아니요 당연히 잘 안 써집니다. 어렵네요.’ 였던 거 같다. 지난한 내용을 담기에 그녀의 질문은 너무 간단했고 내 답변도 너무 간단했다.


연차가 낮다는 이유로 결국 이 회사에는 가지 못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붕 떠있다가 꽤 실망했는데, 지금은 조금 괜찮다. 감사하게도 지난 두 달 간 네 군데 회사에서 나를 좋게 봐줘서 좋은 경험을 했다. 첫 회사 말고도 나의 가능성을 봐주는 곳이 많다는 것, 업계 여기저기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익숙한 곳을 벗어나도 큰 일 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느꼈다. 솔직히 지금 회사에서 오래 있는게 답은 아닌 거 같아서 불안하지만, 대신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어디가서도 잘 해낼 자신이 왠지 조금 생겼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걸로 지금으로선 충분한 것 같다.


그런데 다음에 또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카피 쓰는 건 늘 어렵죠.’ 라는 말로 운을 띄우고,

‘그런데 저는 어려워하지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다양하게 쓸 수 있답니다.’ 라고 말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