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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혁 Mar 06. 2023

퇴근중독(讀) EP2. 못 다 핀 꽃, 소희에게

두 번째 중독 - 영화 <다음 소희>(2023)

퇴근중독(讀). 격하게 퇴근하고 싶은 어른이가 무지막지한 퇴근길에서 책과 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버스 안에서 1시간 30분가량 낯선 세계에 푹 빠지기도, 때론 5분 만에 곯아떨어져 꿈나라에 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조금 일찍 회사를 박차고 나와 서늘한 공기가 매력적인 영화관에 들리기도 하죠. 이처럼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퇴근길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도와주세요. 저는 지금 퇴근중독입니다!   - 필자 주


아마도 2018년 겨울이었을 터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교 4학년, 필자에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빠른 시일 내에 면담을 하자는 모 전공 교수의 메일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거나, 연구실을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교수가 면담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기대보단 불안감이 엄습했다. 보통 학생이 교수에게 면담을 신청하지, 교수가 먼저 학생을 보자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성적이 학부 최상위였다던가, 반대로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킨 전례도 없었기에 상당히 의아했다. 그렇게 회신을 하고, 공강 시간을 통해 똑똑-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 OO(필자)아, 잘 지내고 있었지?"


특이점이 온 시점은 교수가 먼저 건넨 첫 인사부터였다. 사람마다 '평소 이미지'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학생들 사이에선 소위 '마녀'라고 불릴 만큼 냉소적인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 무슨 일인지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마치 스릴러 영화 <스마일>의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달까. 그래서인지 엉거주춤 "아, 네 교수님"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면담 테이블에 앉았다.


교수는 이상하리만치 설렘 가득한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주전자 버튼을 딸깍 눌러 차(茶)를 우렸다. 그 옆에선 가습기가 평온하게 입김을 내뿜고 있었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뭔가 홀릴 것 같다는 직감 아닌 직감이 들었다. 이런 오묘한 순간이 1분 정도 지났을까. 교수는 둥굴레차를 내왔고, 그 옆으로 한 장의 종이를 쓱 내밀었다.


"우리 OO(필자)이 성적이나 활동들을 보니까 △△ 회사에 딱 어울릴 것 같더라고. 마침 그 회사 대표랑도 내가 잘 알고 있어서 우리 우수한 학생을 소개해줄까 하는데, 한 번 지원해 볼래? (중략) 요즘 또 시기가 시기기도 하고, 취업도 어려운 세상이잖아."


마침 그 말을 들었을 당시가 정말 가고 싶었던 한 콘텐츠 회사의 인턴 최종 면접을 떨어진 시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전에 벌서 두어 차례 쓴맛을 맛본 시점이기도 했다. 교수의 제안은 틀림없이 달콤했다. 보아 하니, 이 업계에서 그렇게 나쁜 평판이 있는 회사도 아니었다. 초년생 입장에선 별도의 압박적인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면접 과정 없이 비교적 손쉽게 취준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필자는 결국 필자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교수에게 최종 결정을 전해주기로 한 기간이 임박할 때까지 고민했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이 종이에 서명만 하면 바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드디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결정적으로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의문 때문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느 취준생들이 겪는 일련의 과정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이런 과정을 평생 겪지 않을 수 있을까? 훗날 경력이 차 이직을 결정할 때, 그때 가서 인생 첫 면접을 준비한다면 오히려 더 어색하고 힘들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더 소름 돋는 점은, 교수의 제안을 거절하는 메일을 보내고 난 그날 저녁에 다른 한 친구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친구 또한 비슷한 시기에 그 교수와 면담을 진행했고, 떼다 붙인 마냥 필자와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엔 마치 나만을 위한 소중한 제안처럼 느껴졌고, 그 제안을 거절하는데도 머리를 조아리듯 연신 죄송하다고 말을 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메일로 거절 입장을 전하느라 교수의 표정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해당 교수는 귀신같이 이전처럼 알지만 못한 사이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 교수의 제안을 받았던 친구는 교수의 제안을 수락하고 졸업하자마자 직장인이 됐다. 그 이후로 직접적으로 회사 생활이 어떤지 등 안부를 묻진 못했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 듣기론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회사를 때려치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회사에서는 그 친구를 인턴보다 못한 '실습생' 정도로 여겼고, 월급 또한 최저 시급 이하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었다. 3개월 이후 인턴 월급으로 전환해 준다고도 했지만, 결국 시간을 끌었다는 게 퇴사 이유의 골자였다. 당시 교수는 "좋은 경험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며 말도 안 되는 위로를 전했다고 한다.



이용, 무관심, 그리고 어른


퇴근 후 영화관에서 만난 영화 <다음 소희>(2023)는 과거 필자의 서늘한 기억을 소환했다. 미디어나 주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살기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었다. 고용 한파가 찾아오고, 취준생들의 학력과 스펙을 점점 높아지는데, (미래는) 어떻게 할 거냐는 그런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말. 그 말 뒤에는 항상 "빨리 어디든 가서 취업하고 경력을 쌓는 게 좋아"라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취준 당시에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결국 소희에게도 이런 말이 닿았다.


<다음 소희>에서는 상고 출신의 여고생 소희가 등장한다. 소희는 여느 또래와 같이 요즘 유행하는 춤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화장품 가게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립스틱을 이것저것 비교해 보는 재미로 사는 평범한 여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교사가 소희를 불러 종이 한 장을 내민다. 기업과 연계해 현장실습생을 파견한 다는 내용이었다. 번듯한 대기업 직영 하청업체라며 소개받은 그곳은 고객들의 살인적인 폭언과 성희롱이 존재하는 콜센터였다.


어쩌면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소희는 그렇게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세상을 접한다. 상황을 벗어나려고도 했지만, 놀라울 만큼 어른들은 소희에게 무관심했다. 심지어는 본인들의 이익과 상황을 위해 참아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희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안타깝게도 <다음 소희>에서는 소희의 힘듦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 옆의 또 다른 소희들이 각자 다른 상황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비친다. BJ의 꿈을 품고 방송을 시작한 쭈니는 방송을 켤 때마다 어른들의 도 넘은 악플들을 견뎌낸다. '먹방'을 하는 날이면 평소 먹던 양 이상의 음식을 과도하게 먹고 방송 종료 후 변기에 엎드려 게워내기를 반복한다. 태준 역시 학교의 소개로 한 공장에 취직하지만, 소위 '어린것들'을 괄시하는 어른들의 집단 따돌림에 힘겨운 일상을 살아간다. 아이들이 이런 상황에 내몰려있지만, 그 어떤 어른도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더 이상 <다음 소희>가 나와선 안 된다


<다음 소희>는 교정에 내걸기 위한 높은 취업률에 혈안이 된 학교의 취업 알선 제도를 비롯해, 관리 책임을 전가하기 바쁜 교육부, 그리고 소희의 사망 사건을 단순 자살 사건으로 취급한 안일한 경찰의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다. 즉'다음 소희', 제2의 소희가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절박한 이들을 이용한 취업 알선 사기가 만연해있고, 구제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미비한 실정이다. 혹 필자의 경험처럼 고등학교나 대학교, 관련 교육기관 등에서 본인들의 실적을 위해 취업 성공이라는 미끼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또,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주위에 실제 많다는 사실도.


그동안 우리는 우리 바로 옆에 서 있는 세상의 소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못 다 핀 꽃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데 지켜만 보고 있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어색할지라도 '잘 지내니' 안부 인사를 건네 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내 연락이 그 사람에게 따스한 구원의 손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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