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 & K-의원내각제(1)
한국형 지속가능 개혁체제 구상: 시스템가이드라인 선출형 의원내각제의 가능성과 구조
1. 문제의식과 시대적 배경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다시 묻는 전환의 시점에 서 있다. 세계 곳곳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으며, 승자독식의 선거 구조와 대통령제의 구조적 독재 유인, 정책의 불연속성이 민주주의 체계 전반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며, 반복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정치 불신과 실질적 무력감을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기 개혁 가능성과 민주주의의 안전장치’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절실하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본 보고서는 “시스템가이드라인 선출형 의원내각제”라는 체제 구상을 제안한다.
2. 국민이 정책을 뽑는 체제: 인물이 아니라 시스템 가이드라인에 최고의 대표성을 부여
시스템가이드라인 선출형 의원내각제는 단순한 권력구조의 전환을 넘어, 국민 주권의 행사 방식을 바꾸는 체제이다. 핵심은 국민이 직접 정책의 방향성을 담은 ‘시스템 가이드라인(정책 포트폴리오)’*을 고안하고 선출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표성을 대의하는 절차인 선거를, 정책의 본질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 참여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체제는 유권자가 단순히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정치인은 그 방향에 충실한 실무 행정가로 기능하게 된다. 즉, 총리와 내각은 ‘정치인’이 아니라 ‘정책 집행자’이며, 그 역할은 개인의 신념보다 집단이 도출한 시스템에 대한 충실한 집행에 있다.
3. 구조와 실행 메커니즘
- 시스템가이드라인의 선출: 국민이 숙의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중장기 정책 포트폴리오를 선출한다. 이는 10년 주기의 정식 선거를 통해 이뤄지되, 중간에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 모듈 갱신 가능.
- 정책개발위원회/정책개발부 설치: 독립성과 위상을 갖춘 상설 기구로, 입법·사법·행정부에 준하는 제4권력 수준의 기관으로 설계. 수장은 직선제로 하여 민주적 정당성 확보. 의원내각제 체제에서는 입법부 내에서 행정부로 돌출되므로, 정책개발부를 독립시켜 입법부(행정부)·사법부·정책개발부로 3권 분립의 균형을 맞추어도 좋고, 입법부(행정부 및 정책개발부)·사법부로 2권 분립으로도 가능.
- 블랭크 영역 최소화: 총리는 시스템에서 허용된 범위 내에서만 재량을 행사하며, 이를 벗어난 결정은 실각 사유가 된다. 이로써 정치인의 자의적 정책 추진은 구조적으로 억제된다.
- 정책방송(EBS4) 설립: 숙의문화를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정책 예능·드라마·토론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국민의 정책 감수성’을 끌어올리는 문화 기반 조성.
- 전자투표 도입과 참여 유형 다양화: 주요 선거 외에도 전자 방식으로 경미한 정책 수정이나 쟁점 사항을 수시로 국민 참여에 부칠 수 있는 구조 설계.
4. 정치문화에 대한 고려
이 체제는 창의성과 검증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 한국 사회는 정책 벤치마킹에 능한 고급 엘리트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므로,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독창적인 구조를 강행할 필요는 없다. 검증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되, 숙의민주주의와 정책 중심 정치문화라는 방향성만큼은 적극적으로 실험하고자 한다.
‘창의’는 자칫 무책임한 시행착오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구조에서는 검증된 것의 재조립과 구조적 설계가 더 유의미하다. 시스템가이드라인 체제는 그런 점에서 창의적이되 위험하지 않은, 한국형 정치 실험이 될 수 있다.
5. 정책 연속성과 민주적 책임의 균형
이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장기 개혁 가능성과 민주적 통제의 병존이다. 내각의 잦은 교체, 다수당의 횡포 (또는 대통령 중심제에서의 대통령의 즉흥적 뒤집기) 등은 모두 국민이 선출한 정책 포트폴리오라는 구조적 기준에 의해 조정된다. 특정 정당의 득표율로 국정 방향이 극단적으로 흔들리는 일이 줄어들며, 국민이 선출한 정책의 연속성은 어느 정권에서도 존중받아야 하는 ‘국민의 뜻’으로 기능한다.
실행자인 총리는 자기 신념이 시스템과 충돌할 경우 일시적으로 정책 집행을 유보할 수는 있으나, 시스템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독자적 정책을 설계하거나 강행할 수는 없다. 이는 총리에게 책임은 있으되, 전권은 없는 균형 구조를 제공한다.
6. 유연성과 확장성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의원내각제와 가장 높은 궁합을 이루지만, 대통령 5년 단임제, 이원집정부제 등 타 체제에서도 변형 적용이 가능하다. 예컨대, 대통령제가 유지될 경우에도 시스템가이드라인을 선출함으로써 대통령의 일방적 정책 전환을 견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최소한의 블랭크 영역을 남기고, 대부분의 정책 기조를 국민이 선출한 기준 안에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만, 한국처럼 제왕적 대통령제, 또 일반적인 대통령제에서도 대표성이 인물인 대통령에 부여되기 때문에, 두 대표성이 충돌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때 인물 중심의 정치 문화를 지닌 나라에서는 시스템가이드라인에 최고의 대표성을 부여했어도 인물인 대통령의 대표성이 간섭 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에 비해 의원내각제에서는 총리보다는 당이 총선으로 국민의 선출 대표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하나의 최고 대표성인 시스템가이드라인에 간섭효과를 일으키려면 당원의 조직적 방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쉽게 내려올 수 있는 총리의 경우에는 시스템가이드라인의 대표성을 능가하기 어렵고, 다수당의 횡포 때에도 그만큼 대통령의 전횡에 비해서는 시스템가이드라인의 대표성을 압도하긴 어렵다. 여기에 조기총선을 위해 다수당을 견제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 국민투표를 통한 국민의 직접민주주의적 개입을 가능하도록 해준다면, 직접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의원내각제를 운영할 힘이 강해진다.
7. 위험 통제: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의 배제
직접민주주의 요소는 강화하되, ‘숙의’ 없는 직접참여는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철저히 절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스템 설계에는 헌법적 합치성과 도덕성 기준을 포함한 숙의 필터가 전제되어야 하며, 극단주의 세력의 목소리는 다수결 이전에 이성의 장에서 걸러져야 한다.
이와 함께, 시스템가이드라인 체제에서도 공약 사기를 친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 설계 역시 필요하다. 보통 이런 체제에서라면 "어떤 시점에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가이드라인의 어떤 정책을 현실화하겠다"는 공약일 텐데, 의도적 태업의 수준을 과하게 했을 경우 처벌이 필요하다. 보통은 실각 사유가 된다. 이때 불의한 세력과 결탁하여 이러한 제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통제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 요구된다.
8. 결론
시스템가이드라인 선출형 의원내각제는 더 나은 제도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문화의 전환 기획이다. 민주주의가 단지 선거의 빈도나 권력의 교체로 평가되던 시대를 넘어, 정책의 일관성과 집단적 지혜를 제도화하는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정치 실험을 감행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더 많은 정치인을 뽑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정책을 이해하고, 스스로 그 방향을 설정해 나가는 국민 주권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제7공화국’ 또는 차차기 공화국의 체재에서 향해야 할 방향이다.
* 시스템 가이드라인은 정책 포트폴리오의 집합. 예를 들어 시스템 가이드라인은 10년에 한 번씩 큰 범위에서 전격적으로 선출한다면, 그 사이에 지선 때든 총선 때든 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모듈처럼 정책 포트폴리오를 수시로 경신 및 갱신한다. 다만, 이렇게 자주 정책 포트폴리오를 경신 및 갱신하다 보면, 특정 분야에서는 시스템 가이드라인 교체 시기에 근접해서 새롭게 적용되므로, 그 정책은 차기 시스템 가이드라인 선출 때 연속성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다. 가이드라인 선거 때 2년 전에 바뀐 최신 포트폴리오는 그대로 준용하면 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