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글 & 시민영성
번영신학의 왜곡과 쇠퇴신학의 가능성
1. 번영신학의 왜곡
- 번영신학은 청교도 전통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신앙과 번영을 동일시한 미국식 왜곡의 산물이다.
- 이는 단순한 신앙의 왜곡을 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종교적 도구로 작용했다.
- 단기적으로는 신앙과 사회적 동력을 확보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신앙과 사회 모두를 얽매고 타락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2. 쇠퇴신학의 정의와 본질
- 참된 신앙은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행위에 있다.
- 이를 ‘쇠퇴신학’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는 곧 자발적 희생과 자기 비움의 신학적 태도이다.
- 역설적으로, 이러한 쇠퇴가 실천될 때 참된 번영이 불길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듯, 진정한 신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3. 신앙의 시험과 왜곡
- 성경은 “부자는 천국에 들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 그러나 인간은 이 가르침에 동요하여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뇌내망상)를 만들어내었다.
- 번영신학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과정의 산물이자, 시험을 앞둔 준비 단계로 볼 수 있다.
- 진정한 시험은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쇠퇴할 수 있는가, 그 권력과 부를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세상에 흘려보낼 수 있는가에 있다.
4. 종교와 현실의 장벽
- 종교 또한 일종의 ‘장사’로 작동하기 때문에 권력을 내려놓는 실천은 극히 어렵다.
- 따라서 쇠퇴신학은 극히 소수만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풍요의 시대일수록 이러한 시험은 더욱 커진다.
- 번영의 순간에 쇠퇴를 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질문이며, 이 질문은 특정 목회자나 신자들에게도 계속 던져지고 있다.
5. 소수 신자의 길
- 쇠퇴신학은 공명심조차 내려놓는 길이다. (역할모델의 영향력으로 모두가 따라하도록 하는 차원에서는 괜찮다.)
- 이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어렵고, 결국 소수만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 더 나아지려는 모든 자의 노력을 기억하시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그다음 장’을 준비하실 것이다.
6. 성경적 시험과 역사적 사례
- 아브라함의 이삭 제사, 욥의 시련, 바빌론 유수와 같은 사건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으라는 시험의 역사적 형상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왜곡된 채 정리된 게 아닐까 싶다. 모두가 이런 말을 담고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라, 너의 목숨과도 같다고 여긴 것, 전 인생을 걸쳐서 일군 것.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것에는 경직된 교조주의가 아니라, 그래서 강제된 방식이 아니라, 자율적 상황에서 스스로 올 수 있을 환경, 기독교의 이타적 실천. 그것을 말하였으나, 실제로 그러지 못하고 교조적 이해관계만을 따졌기 때문에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은 무너졌고 70년 유배 생활을 한다. 쇠퇴신학적 관점에서. 그들은 공동체의 합일을 진심으로 이루지 못하고 형식적 믿음에 빠져 있었으며, 그걸 풍요에 빠지고 탐닉했던 것으로 착각. 그것 때문에 하나님에서 멀어져 신앙을 소홀히 했다기보다 자기 이익에 빠져 풍요의 탐닉과 함께 신앙적 경직을 통하여 타락하고 있었다. 진짜 풍요 다음의 과제에서 낙제점을 받은 셈. 그리고 스스로 무너진 것.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거두어졌기 때문. 카이로스가 없어졌기 때문.
- 그러나 이스라엘은 형식적 믿음과 풍요에 빠져 그 뒤에 받는 가장 중요한 쇠퇴신학적 과제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 결국 하나님은 그 영광을 거두셨고, 이스라엘은 실패를 경험했다.
7. 쇠퇴와 하나님의 섭리
- 쇠퇴신학을 하다 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종교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쇠퇴신학을 하다 망한다고 여긴다면, 사실 망해도 괜찮다. 하나님이 없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종교를 하나님 믿는 방식으로 존속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조차 실천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일하심이 드러난다.
- 다만 이 과정은 사이비나 거짓 선지자의 교조적 착취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 치료와 문명 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물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맹목적 신앙으로 고통을 방치하는 것은 신앙의 왜곡이다. 즉, 쓸데없이 치료받고 나을 일을 신앙의 힘으로 고친다는 뻘짓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인간이 이룬 문명적 기술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이루신 흔적으로 최대한 활용하는 것. 그 너머의 어떤 것이 있다면 그건 믿음과 기적의 영역이지만, 인간이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그것으로 하라는 뜻. 그러지 않고 누군가의 꼬드김에 넘어가 치료비 다 갖다 바치고, 믿음으로 치유되길 바라서는 안 된다.
8. 중재 없는 신앙
- 쇠퇴신학은 자유 의지에 따라 각자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신앙이다.
- 어떤 인간도 권력이나 부를 집중시켜 중재자가 될 수 없다.
- 교조적 중재자는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크며, 진정한 중재자는 오직 성령의 일하심뿐이다. 그러므로 쇠퇴신학은 누군가의 착취를 위한 논리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소수는 자유 의지에 따라 스스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이며, 그 사이에는 누구도 인간 중재자가 될 수 없다. 그는 부를 집중시킬 수 없으며 그건 세상으로 흘러가는 기운을 결집시키기 위한 총무에 불과하고, 함께 고민하는 조금 더 진지한 신도인 셈이다. 사이비 소수 구원설에 빠지지 말라는 뜻.
- 따라서 쇠퇴신학은 사이비 소수 구원설을 거부하고, 개인의 내적 실천과 공동체적 이타성을 강조한다.
9. 결론
- 번영신학은 근대 자본주의적 왜곡으로, 결국 신앙과 사회 모두를 타락시키는 요소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접할 기회를 주는 중간 단계다. 아직 신도가 없는 곳에서 필요한 방식이며, 국교화 등의 방식 역시 종교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접하게 하던 과도기적 단계로, 한국에서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그건 부패한 교단의 이해관계나 잘못된 믿음에 따른 것이다.
- 쇠퇴신학은 권력을 내려놓고 스스로 비우는 신앙의 태도이며, 참된 번영은 오히려 이러한 쇠퇴의 실천 속에서 나타난다.
- 그러나 이는 극히 어려운 길이기에 소수만이 감당할 수 있고, 역사 속 신앙 공동체는 이 시험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해 왔다.
- 오늘날의 신앙은 다시 한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너는 나를 믿고 쇠퇴할 수 있느냐? 그 모든 힘을 나에게도 주지 말고 세상에 주어라. 그것은 나에게 주는 것과 같다.’
- 예수님은 두 가지 계명으로 구약을 요약했다. “오직 여호와임을 알라”는 수직적이고 우주적인 가치를 통해 세상의 원천이 여호와로부터 온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 선언이며, 둘째는 “내 몸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수평적이고 세상적인 박애와 평등의 정신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그걸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지만, 여호와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쇠퇴신앙의 근간이다.
- 자발적으로 쇠퇴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적으로 번영하라.
- 즉, 올바른 민주주의가 기독교에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시험대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시험하는 것. 그것이 실천될 때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존경받는 종교로 거듭날 기회를 얻을 것이다.
10. 참고: 쇠퇴신학적 전통, 수도원 운동 (기독교는 세상의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나라)
▶ 그러나 그 한편에는 권력을 내려놓고 ‘쇠퇴’를 실천한 흐름도 있었다.
- 베네딕트 수도회(6세기):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를 모토로 세속 권력을 멀리하고 절제의 삶을 지향.
- 프란치스코 수도회(13세기): 철저한 청빈과 자기 비움을 강조. 재산 소유를 거부하고, 도시 빈민과 함께 살아가려 했음. → 오늘날 “쇠퇴신학”과 매우 닮음.
- 도미니코 수도회: 학문과 설교를 통한 봉사, 교회 권력보다는 복음 전파에 초점.
▶ 중세 수도원 운동은 “권력을 움켜쥐는 교회”에 대한 신앙적 저항이자, 쇠퇴신학적 실천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교회 권력 자체가 세상과 멀어졌다기보다는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하나님의 질문을 소수만이 붙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