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 고흐
1. 주인 없는 의자
부서진 의자를 고치지 않고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잠시 잊었다.
2. 낡은 우산
현관 구석의 낡은 우산은 단순히 쓰임을 다한 생활 도구다. 그러나 그 우산은 ‘사용자의 반복적 습관’과 연결된 기억을 붙잡는다. 천이 해지고 살이 휘어져 더는 기능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용이 아니라 기억 때문이다. 사물은 이렇게 기능이 사라진 이후에도 정서적 부가가치로 남는다.
3. 빈 머그컵
책상 위의 머그컵은 일상에서 가장 흔한 물건 중 하나다. 그러나 특정인의 사용 흔적, 예컨대 입술 자국, 커피의 잔향 같은 것. 그것은 실은 존재하지 않고, 남았더라도 쉬이 감각할 수 없지만, 환지통처럼, 그 사람의 부재를 더욱 구체적으로 각인시킨다. 매일 세척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얼룩이 아니라 기억이다. 사물은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는 촉발 장치로 기능한다.
4. 창문
창문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단순한 구조물이다. 하지만 누군가 반복적으로 그 공간을 특정한 방식(담배, 시선, 휴식)으로 점유했을 때, 창문은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을 보관한다. 이후 창문을 열고 닫는 행위는 그 부재를 더 뚜렷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사물은 행위의 기억을 매개하며, 반복이 끊어졌을 때 결핍을 드러낸다.
5. 빈 책장
책장에서 빠져나간 한 칸은 물리적 결핍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새 책을 채울 수 있음에도 일부러 비워두는 행위는 부재를 의도적으로 보존하는 전략이다. 사람은 결핍 자체를 ‘기억의 공간’으로 관리하기도 한다. 비어 있는 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겨진 흔적이다.
6. 반복되는 일상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흔적들
현관 구석에 우산이 하나 서 있다. 펴지지도 않는다. 버려야 맞다. 하지만 그대로 둔다. 이미 쓸모는 없고, 남은 건 사용자의 그림자다.
책상 위 머그컵은 매일 씻는다. 얼룩은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건,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 습관이다.
창문은 열고 닫는다. 공기는 바뀌지만, 담배 연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창문은 매번 똑같이 열리고 닫히며, 그 결핍을 증명한다.
책장 한 칸이 비어 있다. 새 책을 꽂을 수 있다. 하지만 비워둔다. 비워둠으로써 부재를 관리한다.
사물들은 기능을 잃고 난 뒤부터 역할이 바뀐다. 기억을 붙잡고, 부재를 보여주고, 잊히지 않게 만든다.
7. 당신 없는 집
집이 없어서 당신이 없는 것으로 하였다. 멀리 떠난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