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무더운 어느 날,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다시 4년이 흘러, 2003년 어느 날, 종훈은 진웅의 자취집에서 술을 마신다. 진웅은 연극을 하겠다며 집을 나와 독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이후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한 듯하다. 종훈과 진웅은 술을 마시며 우주를 떠올린다. 우주를 떠올릴 타이밍도 아닌데...





♬ 2003년 무더운 어느 날,

말보로 레드의 키가 빠르게 작아졌다. 피어나는 연기는 공중에서 천천히 흩날리며 후텁지근한 무더위를 뚫고 당당했다. 무더위가 무쇠 덩이로 날아와 강력한 연타를 먹였다. 습기 때문인지 열대야의 옥상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온종일 열을 삼킨 옥상 바닥이 항변하는 듯했다.

“한잔 하자.”

진웅은 건배를 권했다. 건배! 2층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돈으로 마련한 거니? 가출했는데 집에서 도와줄 리는 없을 테고.”

그의 전세방은 연신내에 있었다. 가파른 언덕의 네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집이었다.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이층집이었다. 그는 그 집의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말로만 듣고는 찾기 어려울 만큼 지형은 복잡했고 허름한 집이 몰려 있는 동네였다.

“가출이라니? 나이 먹었으니 꿈을 이루기 위해 나온 거지.”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랐는지 살짝 혀 꼬인 목소리로 내 말에 정색했다. 그러곤 자신이 끓여온 라면 냄비에 젓가락을 찔러 넣었다. 나는 신문지를 펼치고 그 위에 오징어를 뜯었다. 가스레인지에 놓인 채 처절하게 잘 익어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오징어 줍기 국제 대회에 나가면 분명 수상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진웅은 면발을 돌돌 말아 후루룩 소리 내며 먹었다. 면발이 입으로 요동치며 빨려 들어갔다. 툭, 짧은 면발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국물 몇 방울이 진웅의 입가에 묻었다.

“너 말이야, 재주 좋다. 이렇게 전경 좋은 데다가 집도 얻고.”

나는 포테이토칩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배 갈리듯 과자 봉지가 뜯기자 포테이토칩 하나가 반동하며 튀어나왔다.

“전경이 좋기는.”

놀러 온 사람에게는 낭만적인 전경일 수도 있지만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는 낭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웅은 정말 이곳에서 홀로 일어서려는 듯했다.

“아무래도 연습실 근처로 집을 옮기는 게 나을 듯해.”

“돈은?”

“없지.”

“그럼?”

“희망 사항이라는 거지. 이것도 차 팔아서 마련한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층이라 해 봤자 옥탑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 한 칸에 조그만 거실, 부엌은 밖에 따로 나 있었다. 그나마 운치라고 할 만한 것은 2층 마당에 놓인 평상이었다. 한여름 밤에 평상에 누워 있으면 별 구경은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기 밥을 좀 주겠지만 말이다.

남자가 혼자 살다 보니 살림살이는 부실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급하게 나온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비좁은 방 안에는 옷 몇 벌과 조그만 TV 그리고 책상이라고 하기 좀 그런, 넓은 밥상 정도.

밥상 위에는 연극 관련 서적이 놓여있었다. 책상의 용도로 쓰이는 듯했다. 밥상 옆에는 엉성하게 개켜진 이불이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이 새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눈에 띌 만한 것은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 그답지 않게 밥상에 놓인 20대 초반의 여자애 사진이었다.

연극이론서에 꽂혀 있는 사진의 주인공은 진웅의 타입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의 취향과는 달라질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리 변했어도 이렇게 변할 수는 없다. 못생겼다는 말은 아니지만 너무 평범해 보였다. 깔끔한 체크무늬 니트에 면바지를 입고 갈색 캐주얼화를 신은 여자는 수수해 보였다. 예쁘장한 건 분명했지만 별 특징은 없었다. 진웅을 아는 사람이라면 소위 킹카만 데리고 다녔던 그의 편력에 비해 대상이 다소 초라하다는 의견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여자애는 누구냐?”

나는 오징어 다리를 물어뜯으며 물었다.

“누구?”

“아까 너 라면 끓일 때 책상 위에 놓인 사진 봤어.”

잠시 진웅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괜한 걸 질문한 듯했다.

“그냥 난 꼭 쓸데없는 것만 궁금하지. 말하지 않아도 돼.”

사족이라 여기면서 나는 변명하듯 말을 뱉었다. 진웅은 순간 스쳤던 어두운 표정을 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봉지를 뒤져 레종을 꺼냈다.

“밤하늘이 진짜 좋다. 꼭 우주 같다.”

하늘에 별이 몇몇 박힌, 밝은 밤이었다.

“그래, 꼭 우주 같다……. 그런데 우주, 자살한 거겠지?”

“하늘이 우주 같다는 게 한우주 얘기로 넘어간 거냐?”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떤 사람과 관련해서 깊이 각인된 사물이나 말이 있다면 그것으로 약한 자극을 받아도 그 사람과의 추억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니? 그거밖에 없잖아. 물론 아무도 모르지. 우주 아버지 외엔.”

진웅은 소주병을 따서 내 잔에 한 잔 따르더니 말을 이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명백해 보이니 어쩔 수 없지.”

“그건 너무 간단하잖아? 무책임한 것 아닐까?”

“아니! 그게 더 어려울 걸.”

진웅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녀석 지금쯤이면 사시 합격했을지도 모르는데. 진짜 대단한 녀석이었지. 아직도 우리가 그 녀석 이야기를 하는 거 보면 말이야. 하기야 나도 한우주라는 이름 때문에, 우주란 단어를 내뱉을 때면 그 녀석이 떠오를 때가 있어.”

“당사자의 괴로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살, 그거 주위 사람들한테 몹쓸 짓 하는 거 아닐까?”

종훈이 물었다.

“수현이 말이로군.”

"응?"

"수현이가 자주 그런 말 해."

그러고 보니 언젠가 수현이 그런 내용의 말을 한 것이 떠올랐다.

“맞아. 나도 들은 적 있던 거 같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지. 하지만 그걸 모두 감안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되었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고 진웅은 담배를 빨았다. 나는 라면 국물을 떠먹으면서 우주가 청소년 시절 우리에게 어떤 마력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화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녀석, 담배도 많이 피웠지. 넌 담배 많이 피우냐?”

“아니, 가끔 술 마실 때만 피워. 목에 별로 좋지도 않은 걸.”

나도 새 담배를 뜯어 한 개비 꺼냈다.

“그럼, 끊어. 연극 하는 데 나쁘잖아.”

담뱃불을 붙였다.

“그래야지. 그냥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술 마실 때 피우긴 하지만 끊긴 끊어야지."

레종갑을 내가 잘 볼 수 있게 들어 올려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우주보단 낫다. 걘 만날 독한 거만 피웠지.”

“그래, 말보로 레드 애연가였지. 고등학교 때부터.”

“너, 알았어?”

“응. 녀석, 나랑 동기잖아.”

“너도?”

“그래, 몰래 피우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끊었지. 그리고 1년 전부터 가끔 피우는 거야.”

“끊었으면 계속 피우지 말지 뭐가 좋다고 담배를 다시 피우냐? 담배 완전히 끊는 게 쉽지 않은 건 알지만.”

진웅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넌?”

진웅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내 손을 가리켰다. 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불똥이 발갛게 빛났다. 나는 웃었다.

“담배는 열정적인 사람 같아.”

나는 기억을 더듬어 우주가 했던 말을 근사하게 내뱉으려고 했다.

“불을 붙이면 불꽃이 정열적으로 피어올라. 그리고 필터를 향해 달려가지. 필터에 다다라 꺼지기 위해서 말이야.”

종훈은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무엇인지 몰라 정확히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진웅이 말을 받았다.

“하하, 뭐야! 느끼하잖아. 너답지 않게.”

약간은 진지하게, 약간은 농을 섞은 말투였다. 나는 멋쩍었다.

“이상하다. 우주가 말할 때는 약간 멋있었는데.”

나는 멋쩍었다.

“누군가의 말을 대신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우주가 했다면 분명 멋있었을 수도 있지.”

진웅은 내 꼴이 우스웠던 모양인지 히죽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건배했다.

“난 말이야…….”

“응? 말해봐.”

술잔을 내려놓으며 진웅이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쪽에서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향하는 국도에서 잠시 쉬면서 느낀 게 있어.”

“너 사고 났던?”

“그래 사고 났던 곳.”

“사고 나기 며칠 전이었지. 해가 지는데 정말 아름답더라. 모래 섞인 바람이 살짝 불어오는데 텁텁해서 침을 뱉었어. 그런데 문득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눈물이 맺히는 거야. 그렇게 외롭거나 슬픈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더라.”

“죽을 뻔하기 전엔 비범했군.”

“그런 셈이지.”

“몇 마일로 달리다가 뒤집혔다고 했지?”

“아마, 백마일. 신 나게 밟았지. 시속으로 140 정도.”

“휴.”

나는 술잔을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그때 느낌이 네가 아까 물어본 것 때문에 기억났어. 「뉴질랜드에 입양을 보내면 어땠을까」라는 말.”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나는 잠깐 긴장했다. 하나와의 아기를 생각하다가 한 달 전 일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