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4년 사이에 종훈과 하나에겐 행복한 일도 있었겠지만,) 종훈은 하나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는 이틀 동안 망설인다. 그리고 비겁한 길을 선택한다. 하나는 으레 그럴 것을 알았는지 스스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종훈을 찾아온다. 부끄러운 슬픔을 선물하기 위해서.
♬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말보로 레드의 키가 빠르게 작아졌다. 피어나는 연기는 공중에서 천천히 흩날리며, 후텁지근한 무더위를 뚫고 당당했다.
하지만 하나의 입술은 떨렸고 숨결도 거칠었다. 하나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휴게터엔 학생들로 붐볐다. 여름 계절학기 강좌 때문인지 방학을 했음에도 도서관을 찾는 학생 수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 하기야 취직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라 토익공부다 상식공부다 난리였다. 고시생들은 또 어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자리를 차지하고는 내놓을 생각을 안 했으니 방학이라고 해서 도서관 자리가 남아돌 때는 많지 않았다.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연달아 빨았다. 나는 붉은 불똥에 가슴이 검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녀의 세찬 흡입이 고민과 정비례한다는 생각에 나는 숨이 막혔고 폐에 구멍이 '뽕' 뚫리는 듯했다.
이틀 전 계절학기 수강을 위해 방학에 나온 나는 땡볕 아래에서 하나의 고문과도 같은 한마디 들었다.
“나 임신했어.”
무더위가 무쇠 덩이로 날아와 강력한 연타를 먹였다. 온몸이 휘, 청. 휘영청 해 밝은 낮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녀의 슬픈 눈빛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도 그렇다. 내게 책임이 있었지만 이런 일을 해결해야 하는 방식을 몰랐다.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나는 이틀 동안 연락이 닿지 않던 내게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피부가 까칠해 보였다. 못 본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차마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고개를 숙였다. 피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되도록 시간을 끌고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서로에게 아무 득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병원 알아놨어."
하나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낙태.’
아무래도 이 방도 외엔 없었다. 난 이제 4학년이다. 취직 때문에 민감할 때인 데다가 최근 엄마와 아버지가 다시 합쳐서 예전 집으로 이사했다. 바쁘고 경황없다. 게다가 난 아직 하나에 대해 확신이 없고 결혼은 두려운 일이다.
사실 정확한 감정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나의 모호한 감정을. 그러니 정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나는 낙태하는 쪽으로 결심한 듯했다. 말보로 레드가 벌써 세 개비째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어정쩡한 태도에 낙태 쪽으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죄책감을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병원…… 어딘데?”
“방이동. 같이 갈 거지?”
‘같이 갈 거지?’
그녀의 물음엔 이미 나에 대한 어떤 신뢰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그 아림을 치유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울 하나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하나의 물음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의 더위는 가팔랐다. 장마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무더위가 쏟아져 내렸다.
♬ 슬픔이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어.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아서 외로웠어. 나는 정말 왜 당하기만 할까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런데 정말 그 증오하던 일들을 내가 고스란히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게. 그 기분 아니?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는 기분.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 몰려오는 비참함. 그때 비로소 슬픔이 완성되는 거야. 훈장처럼 남은 슬픔은 누군가의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부끄러운 슬픔은 오직 홀로 견뎌내야 하거든.”
언젠가 하나가 나를 보고 이처럼 말했었다. 무엇 때문에 그 말을 기억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대단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말만큼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