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 지독한 미련, 지긋한 신앙 그리고 집요한 응집력
먼- 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 믿고 싶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죽어보니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면 우리보다 먼저 먼지처럼 흩날린 것이겠지만,
지- 독한 미련으로, 지긋한 신앙으로 우리는 지긋지긋할 수도 있을 삶을 그럭저럭 산다. 미련은 그리움을 낳고, 신앙은 당신이 먼저 간 ‘지금보단 조금 나은 어떤’ 세상을 상상하게 해준다.
가- 련하고 그리운 사람!
보- 고 싶은 사람,
이- 생에선 만난 적 없는 사람, 수없이 만난 사람
는- 누군가의 질시였고 누군가의 사랑이었으며 누군가의 증오였다.
아- 직도 가끔 생각나는 건 스무 살 어느 아침, 예술영화를 보겠다며 키에슬롭스키의 <블루>를 틀어놓고 눈물을 흘릴 때였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청소해야 한다며 창문을 열었는데, 커튼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았다. 활기찬 먼지였다. 빛에 반짝이는 그리운 때였다. 난 그런 때로 이루어졌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때를 벗겨내면 난 언젠가 다 떨어져버린 몸의 노폐물들로 이루어진 집요한 응집력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게 물에 다 풀리고 겨우 말라서 풀풀 날리면, 그때 조금은 알고 싶었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침- 침한 눈을 바로 떠보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건 당연하다.
☎ 김소연, <먼지가 보이는 아침> 제목 인용
√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힘
아침마다 나는 유리컵에 물을 따른다. 어제보다 조금 덜 맑은 물이다. 눈에는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순간, 컵 안에서 미세한 것들이 서로를 밀치며 떠다닌다. 나는 그걸 믿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누군가 먼저 건너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명할 수 없지만 버리지도 못하는 생각.
사람은 이상하게도 버텨야 할 이유가 없어질 때 더 집요해진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힘은 대개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사소한 상상에서 나온다. 저쪽에는 지금보다는 덜 아픈 세계가 있을 거라는, 혹은 최소한 설명이 붙은 세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 그 믿음이 없으면 삶은 너무 투명해서 금세 깨져버린다.
나는 많은 얼굴을 떠올린다.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얼굴, 또는 너무 오랫동안 보지 않아 기억이 흐릿해진 얼굴. 나는 내 주민증에 박힌 내 얼굴에 거부감이 없지만, 이제는 그 얼굴과 내 얼굴을 비교하며 긴가민가한 경우가 많아졌다. 내 얼굴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날마다 연결되었으므로, 연속적인 시간 안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증거들, 예를 들어, 새치라든가, 푸석해진 얼굴에서 가끔은 예전 앨범의 나와 뚜렷하게 달라진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게 가끔은 나조차 기존의 정보로부터 새롭게 갱신된다. 하물며 타인이야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할 수 없는 그들의 어떤 이미지, 그것은 정확한 것이었을까.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 역시 정확한 것이었을까.
어떤 이는 나를 부러워했고, 어떤 이는 미워했고, 어떤 이는 이유 없이 좋아했다. 그 감정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몸 어딘가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때처럼. 문질러도 잘 떨어지지 않는 것들.
오래전,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던 날이 있다.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화면이 푸르렀고, 음악이 낮게 깔렸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고 싶었다. 그런데 창문이 열리고 공기가 바뀌었다. 빛이 들어왔고, 그 순간에 아주 작은 것들이 반짝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그때 느꼈다. 나는 단단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흩어질 준비를 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것들의 덩어리라는 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반짝이는 작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을 튕겨내는 결집된 나란 이름의 작은 조각들이 있었다. 언젠가 이 응집이 풀려 바람에 섞일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사실을 이해하게 될까. 아니면 이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어진 상태로 사라질까.
아직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물을 따르고, 컵을 들여다본다. 침착한 얼굴로. 얼굴에서 떨어지는 나의 흔적이 물을 덜 맑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흔들리는 손에 쥐어진 물컵이 살짝 흔들렸고, 아주 희미한 파문이 물결처럼 일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