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어쩌면 이 소설은 이 장면을 위해 쓰인 것일 수도 있다. / 진웅과 술자리를 하면서 종훈은 여러 착잡한 감정을 경험하고, 또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깨닫는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다음날 친척을 맞기 위해 집에 가는 길에, 8년 전 놀이터에서 보았던 그 아주머니를 보게 되는데... 종훈은 8년 전 우주의 감정을 조금은 경험한다.
♬ 귀가중
택시 기사가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순간 술기운이 돌아서 잠이 들었었다.
미터기의 금액이 내가 줄 수 있는 금액을 앞지르려고 했다. 나는 얼른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내린 곳이 어딘지 둘러보았다. 다행히 우리 동네였다. 고딩 시절 하굣길에 이 지점을 지날 때면 비로소 절반쯤 왔다고 환기하던 낯익은 곳이었다. 길 건너편에 구멍가게가 24시간 편의점이 바뀐 지 2년이 지났다. 주변엔 버스정류장이 있고 놀이터가 있다.
우주의 아지트였던 그 놀이터였다. 나는 몸을 가누며 놀이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에서 빛이 쏟아지지만 않았더라면, 미세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이 불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무심코 놀이터를 지나쳤을 것이다. 그만큼 오랜만에 느낀 가로등 불빛이었고 바람이었다. 나는 놀이터로 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혔다. 철봉을 만졌더니 아직 미지근했다. 미끄럼틀이 보였다. 새로 페인트칠이 되어 깔끔해 보였다. 밤이라서 놀이터 주변 보도블록에서 아지랑이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8년 전과 달리 숨이 막힐 정도의 열대야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미끄럼틀로 다가갔다. 미끄럼틀로 올라가 놀이터를 내려다보았다. 바닥모래는 예전처럼 잔잔했다. 벤치도 말끔하게 페인트칠 되었다. 놀이터는 차도와 가까웠지만 여전히 나무로 가려져 도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차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한적했다. 8년 전 그때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 듯했다.
매미 소리가 들렸다. 놀이터를 향해 은은하게 매미 소리와 가로등 불빛이 무너져 내렸다. 8년 전 놀이터와 지금의 놀이터는 언뜻 변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은 달랐다. 열대야 없는 밤도, 예전보다 늦은 시간의 풍경도, 페인트칠 된 벤치와 미끄럼틀도 달랐다. 이상한 소리를 하던 아줌마와 우주도 없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주만큼 신속하지는 못했다. 불을 붙였다. 힘차게 빨자 불빛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우연인지 매미 소리도 맹렬해졌다. 귀를 할퀴려고 덤벼들 것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매미 소리, 벌써 8년째였다. 생각해보면 우주와 헤어질 때 자극적으로 들렸다고 각인한 순간부터 내게 매미 소리는 너무 쉽게 포착되었다. 어쩌면 다른 이들이라면 매미 소리를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진웅이 휴대폰 소리에 민감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느끼고 알 수는 없었다. 단지 자신이 느끼고 알기를 갈망하는 것을 아주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나에게선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었다. 설령 연락이 없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가 있을 뿐이라는’ 말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독한 냄새를 남길 담배 불똥을 바라보며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보다, 아버지보다도 나을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에게 ‘아버지는 싫지만, 아버진 아버지잖아요.’라는 말을 생각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입안에 쓴 내가 돌았다.
불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재들이 길어졌다. 불똥이 필터에 가까워지자 꼿꼿하던 재 기둥이 노인의 등처럼 구부러졌다. 나는 잠시 떨어지지 않는 재를 바라보았다.
‘시시콜콜한 감상일 뿐이야, 그만하자 김종훈.’
검지로 담배 불똥을 때렸다. 재가 날리고, 붉은 불똥이 잔잔한 모래에 떨어져 서서히 사그라졌다. 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하늘은 맑았다. 그 어둠의 깨끗함은 ‘끝’이나 ‘두려움’ 혹은 ‘사라짐’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둠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을 감싼 채 우주로 확장되었다. 내 시간의 전부를 구성하지는 않았지만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것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항상 흔들림 없이 나를 감쌌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문득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둠을 차분히 느끼려 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빨아 밤하늘을 향해 내뿜었다. 성운 같았다. 불똥은 성운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누워 피워서 그런지 헛기침이 자꾸 나오려 했다. 상체를 일으켜 기침했다.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다시 누웠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서서히 나의 어둠에 몰입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내 뺨을 스쳤다.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만 눈물이 맺혔다. 단순히 하나와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올바르게 책임지는 법을 알아야 했다. 답이 너무도 단순하고 명백해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간단하지 않았다. 나와 내 주변을 올바르게 책임지는 것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적인 구도로 규정해버리는 건 곤란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책임지려는 노력을 미약하게나마 할 뿐이다. 그것은 내 앞의 얼음이 깨질지 몰라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를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었다.
“연세대, 연세대 앞에서 우리 아들이 죽었어. 독재정권이 내 아들을 죽였다.”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소리가 잠들어가는 나를 깨웠다. 몽롱한 기분으로 방심했기 때문에 소리가 제법 날카롭게 들렸다.
하지만 반가웠다. 여인의 첫마디는 8년 전과 변함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여인의 옷이 바뀌었고 조금 늙어 보였다. 처음부터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 완벽히 똑같을 순 없었다. 완벽히 똑같을 순 없더라도 너무도 이질적이라 섞일 수 없을 때 느끼는 당혹감보다는 나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눈물겨움이었다. 달라진 점을 찾고 그것을 추억 위에 새로 쌓고 나서 생기는 감정. 어찌 보면 지금의 내가 추억을 지닌 것이 아니라 추억 위에 지금의 내가 쌓이는 것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반가운 이를 보았고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히틀러, 히틀러!”
나는 8년 전 일을 더듬으며 겨우 두 단어를 소리치듯 뱉었다.
“히틀러, 히틀러, 이 나쁜 녀석아. 우리 아들을 죽이고 매일매일 우리 아들을 고문해. 야,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 우리 아들 위해서라도 다 까발리고 다닐 거야.”
너무 기뻐서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히틀러가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을 때!”
더 많은 단어들을 기억해냈다.
“히틀러가 일본에 원폭 투하했을 때 우리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네놈들이 알아?”
“하느님이 천벌을 내릴 거야.”
모든 것을 기억해내고 나서 느끼는 성취감에 환호하듯 소리 냈다.
“하느님이 천벌을 내릴 거야.”
여인이 중얼거렸다.
“부처님이 천벌을 내릴 거야.”
내가 중얼거렸다.
“부처님이 천벌을 내릴 거야.”
다시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조용하게 한 곳을 응시하다가 다시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경비원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손전등으로 잠시 놀이터를 훑더니 그냥 지나쳤다.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주민들이 포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제재가 없는 작은 공간에서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순간을 맞았다. 어찌 보면 지극히 종교적인 경건함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 점 때문에 놔두는 건가? 잘은 모르지만 여인은 8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수백 년 동안 한 곳을 맴돈 원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여인에게서 귀기를 느껴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녀의 자리에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우주가 했던 말을 언뜻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여인이 불쌍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서웠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 술 마신 게 잘못된 모양이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줄담배를 피운 게 화근이었다. 이럴 땐 토해 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재빨리 미끄럼틀을 내려와 토할 만한 곳을 찾았다. 급하게 눈에 들어오는 곳은 쓰레기통 근처였다. 달렸다. 토했다. 잘 반죽이 된 놈들이 쏟아져 내렸다.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뒤늦은 토사물 몇 점 게워냈다.
눈물이 맺히고 콧물이 흘러내렸다. 꾸역꾸역 먹고 모조리 내뱉더니 눈물까지 흘렸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순간 살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 모습이 참 추할 것이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침을 뱉었다. 신 내가 입안에 돌았다. 나는 한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손가락 사이에 배어있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시 헛구역질을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냄새는 영원히 죽지 않고 내 몸에 숨어서 쌓이기만 한다고 했다. 우주의 주장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진웅에게도, 하나에게도 쌓여있을 냄새는 그렇게 내게도 몰래 숨어 살고 있을 것이다. 과연 냄새들은 행복할까? 아니면 언제든 쫓겨날 불청객 취급 받으면서도 힘겹게 버티며 내일을 향한 불안한 행복을 이어가고 있을까?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었다.
“목말라. 물 좀 줘.”
“없어요. 집에 어서 가요.”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물이 없었다. 심지어 맥주도 없었다. ‘연기라도 마실래요?’ 이럴 순 없지.
“목말라. 물 좀 줘.”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경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 낯선 이를 너무 경계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경계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순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정말 없다니까요. 그보다 너무 늦게까지 이러지 마요. 집에 어서 가는 게 좋겠어요.”
여인이 내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물이 없다는 것만 이해했는지 별 반응 없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여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물을 주는 것뿐이었다. 편의점은 가까웠다. 하지만 되돌아가기가 번거로웠다. 나는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놀이터를 벗어나자, 큰길을 열어주는 가로등 불빛을 만났다. 날벌레들이 가로등에 몰려서 먼지처럼 날아다녔다. 매미 소리가 들렸다. 이때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가 파편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여인의 낮은 중얼거림에서 ‘우리 아들’이 유독 강하게 소리 났다. 우주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우주의 시큰둥한 대답처럼 단순히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섞은 것일 수도 있고,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독재정권의 피해자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여인을 아픈 추억을 지닌 가련한 어머니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하나의 믿음을 마음에 담는 순간이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건널목에 이르렀다. 빨간 불에 가로막힌 좁은 건널목을 바라보며 잠시 건널지 망설였다. 그리고 건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야 할까? 하나를 알기 전으로? 하나가 임신하기 전으로? 그도 아니면 하나가 고백했을 때 그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던 그때로?
이왕 걸어갔으니까, 지나쳤으니까, 명랑하게 때로는 슬프게 건널목을 지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히 지나쳤으니까 지나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동기만 있었어도 아무 생각 없이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불행한 사람은 추억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말 불행한 사람은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작은 동기를 찾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놀이터로 되돌아왔다. 맥주를 살까도 생각했지만 우주와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 곳을 응시하는 여인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여인은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요, 물 가져왔어요. 마셔요.”
여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생수병을 내민 손이 민망했다. 여인은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입 모양은 끊임없이 변했지만 말이 들리지 않았다.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침묵을 뱉어내는 듯했다. 깊은 고요가 일었다. 수백 년 동안 한 곳을 맴돈 원혼이 마지막 제의를 치르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지독히 무서워 조금은 슬펐다. 낯선 자가 스며들 곳은 없었다. 생수병을 그녀가 앉을 벤치에 놓았다. 여인의 자리에 내가 있을 수는 없었다. 여인의 자리는 오로지 여인만을 위한 자리였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있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는 믿음도 결국은 완벽할 수 없었다. 언제나 조금씩은 다른 지점에 서 있어야 했다. 나는 완강한 고요에 밀려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큰길에 이를 때까지 매미 소리조차 깊은 고요에 묻혀 있었다.
매미 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할 때 걸음은 집을 향해 빨라졌다. 머리가 아팠다. 무겁게 내려앉다 다시 날카롭게 쏘아대는 울음이 가로등 빛을 타고 사방을 넘나들었다. 한여름 밤이면 늘 집에 가면서 듣던 소리였다. 오랜만에 들으니 꼭 싫지만은 않았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목걸이에 걸린 휴대폰에선 여전히 진동울림이 없었다. 휴대폰을 열 때마다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통화 목록엔 진웅의 이름이 맨 위에 올라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이름이 자꾸 아래로 내려다가 결국은 페이지 넘기게 되고 영원히 그녀의 이름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반복해서 빠르게 눌렀다. 페이지가 몇 번 넘어갔다.
「우리 한 달 동안만 연락하지 말자. 한 달 동안만이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무슨 얘긴지 알겠지?」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담담히 나를 바라보았다. 원망하는 눈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랬다. 그게 너무 비참했다.
“용서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래.”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차라리 나를 탓해주길 바랐는데 그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관계를 회복할 또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나는 폴더를 접었다. 목줄에 매달린 폴더가 유난히 무거웠다. 그때 끝까지 빌었어야 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영원히 관계가 망가지더라도 그때만이 그 관계를 회복할 유일한 기회였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후회했다.
한 달이 지났으나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다. 여러 번 걸었으나 그녀는 받지 않는다. 아직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관계가 이미 완벽히 정리된 것일까?
아무래도 내일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하나는 술 취해서 연락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엔 그러지 말아야겠다. 자칫 나쁜 모습만 더 보일 것 같아 두려웠다.
매미가 다시 내 머리를 날카롭게 후벼대듯 울어댔다. 이 매미 소리는 수없이 공간을 바꾸어가며 한여름 속 나의 기억에 따라붙었다. 한여름이 오면 꼭 매미가 울었고 그럴 때면 우주가 생각났다. 나는 우주가 살았던 동을 바라보았다.
담뱃갑에 남아있던 한 개비의 말보로 레드를 꺼내어 물었다. 인제 담배를 끊어봐야겠다고 다짐하였더니 입에 문 담배가 평상시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말보로 레드 애연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레들린 것처럼 쿨럭였다.
“이야, 네가 이렇게 독했냐?”
담배를 살피며 혼자 중얼거렸다.
매미 소리가 격렬해졌다. 가로등의 불빛에서 날리는 날벌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점점 앵앵거리는 강렬한 기타 소리, 마티 프리드먼의 독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파괴를 위한 교향곡이었던가? 내 머리끄덩이를 붙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정신 차리라고 호되게 나무랐다.
휴식터 중간에 설치된 정자 옆 느티나무에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매미의 울음도 불빛에 교란돼 낮인 양 요란했다. 나는 취해서 휴식터 정자 옆 느티나무에 오줌을 누면서 머리를 나무에 찧었다. 담배 연기가 눈을 찔러서 매웠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콧물이 찔끔 나왔다.
“거기 학생 뭐해?”
경비원 아저씨가 야간 등을 비추며 내게 무슨 부끄러운 짓이냐며 호통을 쳤다.
“매미 소리 때문이에요.”
“응?”
“매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랬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취했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지 다 큰 사람이 여기서 이러면 쓰나? 몇 동 몇 호야?”
담뱃재가 입술로 달려올수록 연기는 더욱 거칠었다.
“미안합니다.”
경비 아저씨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담배가 입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우주야. 다신 싸가지 없는 짓 안 할게.”
나는 무엇을 위해 용서를 비는지 몰랐다. 더구나 어째서 우주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풀릴 줄 알았던 모호함이 더욱 모호한 상태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어렴풋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삶을 진실로 위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내 아기, 하나, 아버지도, 와타나베 씨도 그리고 나와 스쳤던 모든 사람에게.
매미 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나는 실없이 웃었고 경비 아저씨는 내게 정신 차리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채근하며 다른 동으로 사라졌다.
마티 프리드만 대 김종훈, 1 대 0.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진동이 매미 소리처럼 격렬히 울렸다. 어머니의 문자였다. 무슨 내용일지 대충 알았고 역시 맞았다.
「와타나베 씨 오는 것 잊지 않았겠지? 내일 공항 나가려면 일찍 들어와라.」
나는 떨어진 담배를 줍고는 바닥에 걸터앉아 마지막 한 모금까지 힘껏 빨았다. 그만 눈물을 머금고 피식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고 했는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넌 정말 하늘 위에 있긴 있는 거니?”
담배 불똥이 필터를 향해 맹렬히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