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별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뉴질랜드 여행 후 하나의 마지막 모습은 종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재스민과의 얽힌 관계 속에서 난감하다. 과거 주희를 원망했던 자신이 애매한 위치에 처했던 것이겠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하나의 책임을 미루려는 것이었을까. 하나는 어째서 그랬는지 알 수 없을 노릇이다. 누군가를 끊어내야 하는 사람처럼. 그때 종훈은 처음으로 양성애자라고 고백하는 존재를 대면한다.





♬ 나라고 별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하나와 내가 첫 키스 하던 날 재스민이 사라졌다. 오클랜드로 돌아간다는 쪽지만을 남기고.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외에 재스민도 있다는 걸 잠깐 잊었었다. 그 탓에 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솔직히 둘만의 시간이 생겨서 나쁘지 않았지만 하나는 그렇지 않은지 오클랜드로 돌아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결국 여행은 거기서 끝났다. 타우포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가기는 했지만 하나와 가지는 못했다.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평일 저녁의 오클랜드는 도시라는 걸 무색하게 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나마 연말이라 그런지 인파가 제법 있었지만 한국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아주 작았다.

재스민은 숙소에 있었다. 줄곧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분명 심한 다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있을 자리는 아닌 듯해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둘은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재스민은 숙소를 옮겼고 하나는 이틀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어학원에 갔다가 그녀의 숙소를 찾으면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나무늘보처럼 쉬고 있었다. 스트레스 받을 때 하나가 취하는 해결법이었다. 떠나려면 남은 시간이 나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오클랜드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냈다. 나는 답답했다.

“그렇게 답답하면 학원으로 와. 재스민에게 만나서 얘기하자고 말해봐.”

하지만 재스민은 어학원도 옮겼다.

한동안 안 보였지만 곧 나올 것이라 여겼었기에 제법 당황스러웠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연인을 떠나보낸 것 같은 꼴이었으니 여자끼리는 동성 간에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좀 유난스러웠다.

왠지 나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가 재스민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없다고 그녀를 완곡히 타일러야 할 것도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 안 하길 천만다행이다. 하기야 그 말을 했다 한들 지금 재스민을 만날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비웃고 있어도 나와 상관없었다.


“나 바이섹슈얼이야.”

방에 틀어박혀 있는 하나를 끌어내어 바람을 쐬자며 오클랜드 시내를 돌 때, 그녀가 내게 한 고백이었다.

마오리족이 서빙하는 선술집에 가자고 제안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생소한 단어가 내 귀에 박힌 것이었다.

“응? 바이 뭐라고?”

바이(bye) 바이(bye), 굿바이(good bye) 혹은 ‘사다’의 바이(buy) 정도를 떠올렸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만큼 그 단어는 제자리를 찾지 못한 뜬금없는 단어였다. 그녀가 커밍아웃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단어는 이질적인 느낌 그대로 입안을 맴돌았다.

화해를 중재하기 위해 재스민이 새로 다니는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하던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 것일까? 아마 하나는 그 말을 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느끼기에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아무 비중 없는 사람에게 하는 농담처럼 들렸다.

“바이 섹슈얼이라고. 양성애자.”

“양성애자? 그게 뭔데?”

단어의 의미는 서서히 내 이해의 범위로 좁혀 들어왔다. 그리고 이해의 골대로 골인하는 순간 나는 좀 멍했다. 당연히 멍할 수밖에 없질 않은가. 조금만 멍했다는 정도니 그나마 난 양반인 것이다.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정리해야 했다. 한심하게도 꼭 가슴에 품고 있던 왕자 같은 착각은 거지같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면 혹시 재스민도?”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선술집은 벌써 지나쳤다,) 재스민에 관한 부분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하기야 수상하기는 하나보다 재스민이 더 했으니까.

“재스민은 몰라.”

하나는 천연덕스럽게 부인했다. 그래서 헷갈렸다. 심증으로는 아닐 수가 없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부인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널 가지고 장난친 것도 아니었어.”

하나는 앞만 보고 말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클랜드의 한적한 저녁거리에 그녀와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차가 투박한 엔진 소리를 뿜으며 드문드문 지나갔다. 불그스레한 노을이 융단처럼 펼쳐졌다. 담배 불똥이 연기가 되어 공중에 흩뿌려진 것 같았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벽에 가서 찰싹 붙었다. 서서히 어둠에 묻혔다. 곧 어두워졌고 가로등이 켜졌다. 화려한 색깔이 번지고 나면 늘 그렇게 어둠이 깔리게 마련이었다. 사람은 그 어둠에서도 화려한 색깔을 연장하기 위해 가로등을 켜는 것이라 멋대로 생각했다. 길의 소실점에서도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뿜어졌다. 별빛 같았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나왔던 오클랜드의 거리를 둘은 침묵을 지키며 걸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소실점의 별빛 같은 가로등을 향해 걷고 있었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단지 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만이 있어.”

하나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말, 그럴듯하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하나의 말을 듣자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기가 막히긴 했지만 이상하게 분노는 거기까지였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씁쓸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자칫 사랑할 뻔했는데 이쯤에 안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딱 그 정도만 그녀를 좋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치명적인 상실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사이를 쿨한 사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하나와의 관계 그렇게 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직 달콤하게…… 사탕하는 사이니까.

“그래? 오히려 난 오빠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는 거야. 나를 용서해주었으면 좋겠어. 미안해. 오빠. 정말이야.”

“그런데 그런 걸 왜 말하니?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재스민을 사랑하면서 내게 왜 그런 행동을 했지?”

“다시 말하지만 장난친 건 아니었어…….”

하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게 다 말했어야지. 이게 뭐냐고? 이게 뭐냔 말이야!”

나는 다시 열이 올랐다.

“늘 믿는 사람은 떠났어. 그래서 사람 같은 거 안 믿어.”

“부딪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하니?”

“…….”

하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많이 부딪혀본 듯한 반응이었다.

“누구나 쉽게 판단하고, 누구나 쉽게 상처받아. 그게 두려웠어.”

다시 비슷한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내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너도 쉽게 판단하네. 누구나 쉽게 판단하고 상처받는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나는 약간은 힐난하는 어조로 말한 듯했다.

“그렇다면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할 수 있었겠니?”

하나가 양성애자라고 고백하기 전엔 난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각자의 성 취향이 조금 다른 것뿐인데 뭐 어떨까 싶었다. 당연히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는 거라고 거침없이 생각했다. 나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히 여겼던가.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흐르고 공간도 바뀐다. 이런 변화에 맞춰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도 조금씩 변한다. 색이 바래고 모양이 뒤틀린다. 간혹 윤기가 흐르고 더욱 깊은 향을 뿜어내는 것들도 있지만, 적어도 그녀의 성지향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예전의 대견한 그대로 남지는 않았다.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찾아왔다.

“재스민은 그럼 뭐니?”

“…….”

이번에도 하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재스민을 사랑한 게 아니라 가지고 논 거 아니니?”

조소하듯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우리가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랑하고 싶은 어떤 사람이 나타날 거야. 그때 성심껏 믿으면 돼, 진정한 사랑을.”

그날따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없다는 말이군.”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단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걸었다. 나는 어쩐지 섭섭했다. 재스민 대신.

숙소에 도착해서 계단을 올라 문을 열기 전에 하나는 되돌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해.”

“주위 여건도 그렇겠지.”

“맞아. 오빤 너무 현실적이야.”

하나는 씁쓸한 듯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꿈같은 거, 낭만 같은 거 꼭 필요한 만큼만 지니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너무 많으면 벅찰 것 같아.”

하나는 잠시 공터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사람처럼 약간 멍해 보였다. 숙소 안에선 잔잔히 불빛이 흘러나왔고 공터에선 아이들이 배드민턴 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등을 돌렸고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항엔 같이 가줄 거지?”

하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꾸만 뻔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밉지는 않았다. 공항까지는 바래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떠나기 전 이틀 동안 주변 정리를 했다. 짐을 쌌고 밀렸던 학원수강료 문제를 해결했다. 호주에서 지낼 하숙집에 확인 전화를 거는 등 분주했다. 나는 학원을 마치면 그녀의 숙소에 들렀다. 그녀가 예의상 나와의 관계도 진지했었다고 말한 것이든, 재스민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랬던 것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 그러니까 호주로 떠나기 위해 짐을 들어줄 머슴이 필요했던 것이든 상관없었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어떤 이와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하나와의 관계가 생각보다는 진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단 하루 만에 결론지었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아직 관계가 깊이 발전된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에 제동을 거는 건 비교적 쉬웠다. 뉴질랜드의 자연처럼 신선하게 다가온 하나는 문명의 이기를 타고 신속하게 사라졌다. 전자우편주소만을 남긴 채.

나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되돌아왔다. 문득 그녀와 지냈던 짧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국땅에서 겪었던 황홀함에 눈을 감고 되새겼다. 공항에 바래다주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오클랜드 시가지의 빌딩 사이로 번쩍이는 뜨거운 햇볕을 맞았다. 창가에 부딪혀 번지는 햇빛에 실눈을 뜨고 살짝 눈물을 흘렸다. 뜬금없이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오후가 지나고 선선해질 즈음 나는 버스에서 내려 하나의 숙소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재스민처럼 보이는 여자가 숙소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떠나지 않은 걸로 아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나를 밀어내고 튕겨 나가듯 빠르게 거리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거의 필사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만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재스민일 것이다. 확실히 재스민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느낌상 분명 그녀였다. 아마 그녀도 부산에서의 나처럼 육두문자를 수없이 되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놈’이 하나 더 붙어서 되뇌었을 수도.

그녀를 붙잡아 하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게 말하고 재스민이 받아들이는지 그 반응을 기다려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하나가 정말로 왜 그랬는지 나도 몰랐다.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었다. 날씨는 무더웠고 목이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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