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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18. 2023

외국어영역

에세이


외국어는 내게 블랙홀과도 같다. 내 건조한 고등학생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생활해야 했던 그때, 서울대학교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학교라고 세뇌받을 무렵,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받아든 숫자로만 평가받던 시절, 외국어영역의 작은 구멍은 내가 다른 영역에서 얻은 점수를 야멸치게 빨아들이곤 했다. 당시 자주 받아들었던 모의 수능 평가 내용은 이랬다. ‘동 점수의 수험생과 비교할 때 외국어영역의 점수가 현저히 낮다.’

실제로 수능을 봤을 때는 내가 받을 수 있는 점수 조합 중 최악 시나리오를 받아들었었다. 그 순간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머지않은 미래에 외국어 때문에 인생 살기 고단하겠다는 불안한 심증이 들었다. 그때의 짐작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토익을 잘 받아보려 노력해보다가 결국 나 자신을 ‘외국어 저능아’로 심판해버렸으니까.     


그 싹수는 이미 고등학교 때 보였으니 선행학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국어였던 독일어가 처음으로 내 발목을 잡았었다. 움라우트라는 기호도 생소했지만 그 문법이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발음도 이상했다. 그 언어는 신승훈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며, “이히 리베 디히”라고 속삭이던 낭만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발음은 딱딱한 나무의자 같았다. 서핑을 즐기며 파도의 부드러운 리듬을 탄다고 여길 때 절벽이 나타나 툭,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 독일어 이름이 특히 그랬다. 당시 첫 회화시간에 나는 프리츠(Fritz)였다. 독일 남자 이름으로 흔한 편이었다. 누군가 2차 세계대전 때 자주 등장하는 독일 병정1 등의 이름이라 했다. 나는 나치의 철십자기와 바바리맨을 연상케 하는 긴 코트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탓할 수는 없었다. 사실 칠판에 쓰인 게르만족의 이름 중에 총을 들고 있지 않았을 법한 이름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프리츠라는 간결하고도 다소 건조한 어감을 가진 이름이 썩 괜찮다고 여겼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 이름은 내게 악몽과도 같은 과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첫 시간부터 회화선생님께서는 한 사람마다 붙잡고는 각자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도록 했다. 고1 회화수업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단어 프리츠에 뜻하지 않은 암초가 있었다는 걸 알고야 말았다. 마치 한 음절 혹은 1.5음절 정도의 분량으로 프·리·츠를 발음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발음을 따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발음을 익히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2주일 틈나는 대로 따라 하게 하더니 결국 포기했는지, 근사치에 갔다고 여겼는지 더는 발음을 걸고넘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나 역시 독일어 발음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발음을 묘사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굳이 해보자면, ‘프리―쯔’로 앞 음절에서 급격히 추락하듯이 발음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r’의 발음이야말로 진짜 난제였다. 흔히 구취제거제를 입에 문 채 목젖을 떨며 ‘어어어’ 하거나, 코를 골 때 목젖을 떨며 내는 소리라고 하면 될 것이다. ‘r’은 그 ‘르’인 것이다. 전화기가 따르릉 할 때 그 떨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샌드백을 빠르게 칠 때 부르르 떨며 제자리에서 맴도는 그것의 파동 같은 것이요, 전기면도기의 ‘윙’ 하는 떨림이면서도, 추를 들었다가 놓았을 때 고정대를 그대로 둔 채 쉼 없이 똑딱이는 추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r’은 한국어의 ‘비교적’ 단절적인 음이 아니다.

‘R르르……’인 셈이다.

‘이히 리베 디히’가 독일어의 낭만이었다면, ‘프리츠’는 내가 3년 내내 겪을 독일어 고난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연결한다면, ‘프리츠는 독일어를 사랑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중국어는 또 어떤가. 다른 점이 있다면 독일어는 해보려다가 지루하고 어려워서 잘 못 한 것이라면, 중국어는 시절을 잘 못 만나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학기 초 민망한 내신 성적을 받아들고는 고민 끝에 내포파(내신포기파)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를테면 선택과 집중이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딴생각과 게으름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했지만, 당시로써는 제법 현명한 전략이라 여겼다. 당연히 내신시험 준비를 따로 하지 않았다. 몇몇이 모여 ‘점수 덜 맞기’ 내기를 하기도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지는 반칙이므로 진정한 0점은 결국 정답을 모두 다 알 때라야 가능했다. 나는 중국어를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으므로 순진하게 일렬로 답을 적었고, 무려(!) 28점을 받고야 말았다. 결국 내기를 한 사람 중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맞아서 꼴찌를 하고 말았다. 당시 내기에 이긴 학생은 4점을 맞았으니 한 문제 빼놓고 다 알고 있는 셈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어의 발음과 억양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성조에 따라 단어의 뜻이 달라지니 말 다했다. 그러니 중국어에 흥미조차 없는 나로서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는 좀 나았다. 중학교 때는 제법 잘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 약발이 떨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1학년 말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2학년 때부터 점수는 꾸준히 떨어졌다. 역시 꾸준함을 당할 수 있는 건 없다. 성적하락의 성실함은 재앙에 가까웠다. 그 상징적인 시작은 1학년 회화 면접시험이었을 것이다.

당시 회화선생이 1억을 벌면 그걸로 뭘 하겠냐고 물었을 때, (‘정말’ 농으로) 호떡을 사 먹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잠시 미소 짓더니 그만 알겠다며 더는 묻지 않는 것이다! 불길한 생각이 스쳤고 역시나 점수는 ‘미’였다. 그러니까 당시 웬만큼 못하지 않고는 받기 어렵다는, 진선미 중 가장 ‘아름다운’ 점수를 받은 것이었다. 하기야 남들은 진선미 중 그 어느 것 하나 못 받고 ‘수, 우’에 머물렀으니 그걸로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영어, 내겐 죄악과도 같아 ‘미’웠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영어를 장악하지 못하니 내신이 잘 나올 리 없었다. 영어과를 다녔는데 영어를 가장 못 하니 어디 가서 영어과였다고 말도 못했다.     

 

그렇다고 꼭 부끄러운 일만도 아닌 것이, 사실 대한민국에서 전공을 제대로 살려서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영문과 나와도 인생살이 영문도 모른 채 살고, 국문과 나와도 맞춤법 띄어쓰기 잘 못 하고, 경제학과 나와도 살림 늘 쪼들리고, 경영학과 나와도 경영해볼 수는 없고, 법학과 나와서 법대로 사는 사람 없다. MBA를 이수했다고 농구(NBA)를 잘하는 것도 아닌 데다, 신방과 나온들 신방을 자주 차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방과 전공자가 전공을 살려 장가를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위자료 많이 든다.)

설령 전공을 잘 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별다를 것은 없다. 고시에 합격해도 판결은 엉뚱하게 해대고, 정치인은 정치의 기본도 모르고, 회계사와 세무사는 탈세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돌고, 많은 지식인이 제도와 쉽게 타협하고, 회사원은 본 업무만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처세술에도 능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부가적인 불합리함을 알았다고 해서 절망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여전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으며,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게 완벽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심심할 거라 여기면서…… 그래도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면 나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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