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한달살기] D.18
한달살이를 시작한 지 2주 반이 된 시점, 최고이면서도 최악인 하루를 맞이하고 지금까지 경험한 새로운 사람들, 특히나 겉으로 보이는 신사적인 모습 뒤에 숨겨진 인격들의 유형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분명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훤칠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할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술이 들어가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니 숨겨두었던 본성의 영혼은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 안간힘을 썼고 이 노력은 이내 육체를 지배해 모든 체계를 붕괴하여 대혼란의 시점에 인간들을 밀어 넣었다. 분명 개중에는 오히려 더 나은 인격을 보이는 인간도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억압된 감정을 꽤나 날카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표출 방식은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취객 두 명을 중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역함과 솔직함이 난무하는 글이 될 것이다. 꽤나 안정적인 상태에서 평안한 손짓을 하던 인간들로 둘러싸여 있던 시간들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 참고 부탁한다.)
말 그대로 전쟁에 미쳐있는 유형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아픔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내가 아는 사실은 전무하나 억압되어 있는 무언가로 꽤나 오래 시달려왔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꾸준히 정적이고 조용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분침이 원을 그릴 때마다 단계적으로 분노를 표출해 나중에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싸울 만한 건덕지는 전혀 없었으나 타인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미약하게 변화된 태도나 사용된 한 두 개의 단어를 빌미로 화를 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성의 끈을 잃는 순간 자신의 화의 원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명확한 이유도 없이 지르던 소리는 점점 크기가 커졌고 자신마저도 스스로가 내뱉는 고음에 지배당해 분위기 속에 뛰어들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내뱉게 된 것 같다. 좁은 공간에서 여러 감정들이 오고 가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느낀 부분들까지 정신의 깊은 곳에서 꺼내 자신의 화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진을 쳤고 그 공격선 밖에 선 우리들은 방어벽을 채 설치하기도 전에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무르익어 갈 즈음에는 병을 들고 활개를 치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과거가 꽤나 폭력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병 목을 쥐고 있는 가녀린 손에 담긴 힘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내려칠 용기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병을 사용했고, 그러한 일련의 행위 자체는 타인조차 부끄러움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분노에 대한 병적 집착은 꽤나 숱하게 보이는 현상인 것 같다. “화가 난다”는 감정의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타인에 대한 불만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아둔다. 감정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나 그것들을 걸러 조금 더 정화된 정신 상태를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거나, 방법을 알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던 날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정신 속에 피어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과거에 대한 회상과 함께 여러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어디까지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분노의 줄기가 자란 뒤에는 도끼를 가져와 있는 힘껏 잘라내려 해도 죄 없이 자라난 이파리들만이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상황이 '과거의 분노'를 밥 먹인 시간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면 저도 모르게 이성의 끈을 뿌리치고 '과거의 분노'에 이자를 쳐서 현재에 작게 웅크리고 있는 타인에게 던져놓는 경우들이 생긴다. 이 모든 오착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복기를 해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들을 생각하며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시간들 속에서 내 몸 안으로 침투하고자 하는 독을 최대한 빼내야 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분노를 공기 중에 흩어지도록 만들어 내 몸 안에서는 더 이상 뜨겁게 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의 어린 마음을 다독여주지 않으면 그 어린 마음이 자라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나의 가식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핀 불에 내가 데어 다치지 않도록 이제 나무 조각을 불꽃에 던지는 일은 멈추자.
본능에 충실한 유형이다. 마치 동물과도 같이. 말수도 적고 낯가림이 심해 완전 ‘I’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뒤 다시 술자리를 찾았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자신만의 정신세계로 날아간 것 같았고, 두 손은 깊은 바다에 빠진 것 마냥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며 “나는 잘못이 없어!”를 외치는 덕에 지나가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발을 옮겼는데 이 인간은 전쟁광형의 사람과 싸움이 붙은 듯했다. 정신을 잃고 성적인 욕구에 모든 주의를 빼앗긴 이 인간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사람들을 찾아 나섰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내포된 내용들을 대놓고 설명하는 행위들은 많은 이들의 즐거운 표정을 삽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굳어진 분위기는 풀릴 줄을 몰랐고 급기야 앉아있던 많은 이들의 반감 또한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육체적인 싸움이 터지기 전에 간신히 사람들 사이를 막아선 후 상황을 정리했고 나는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휴식하고 있던 도중 또다시 연락이 왔다. “지금 바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문제가 생겼어.”
잔뜩 불만 섞인 몸짓으로 터덜터덜 내려간 곳에는 더 이상 악화될 곳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직 욕구를 전부 해소하지 못한 인간이 이번엔 벽에 오줌을 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말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허탈함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술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예상을 뛰어넘는 세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나는 분위기와 한 몸이 되어 소리 내며 웃기 시작했다. 특별히 어떤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감각들이 전부 둔감해지는 시점이기도 했고, 나는 늘 세상에서부터 일정 거리만큼 떨어져 벌어지는 현상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바닥을 치워내고 의자에 놓여있는 지친 몸속에서 나는 벌어졌던 일들을 골똘히 되짚어보며 잠에 들었다.
본능, 우리는 평생 동안 본능과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본능이 요구한 수요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만족감 대신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음식을 먹어 배를 불리는 것, 따뜻한 곳에서 잠을 청해 피곤함을 덜어내는 것, 이성과 함께 시간을 보내 종족의 번식을 위해 힘쓰는 것, 이런 기본적인 욕구들은 언제나 모든 것들 위에서 특정 상황을 지배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관리하는 것은 ‘살아있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의 감정들이 내 이성과 육체를 정복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불분명한 것들 사이에서 규칙을 찾아내고 나의 이성이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주기적으로 채워주며 '2차 생존'에 대한 유지력을 보강하는데,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 외의 모습들에서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불필요한 집착이 생겨난다면 '2차 생존'에도 주체성을 갖기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술이 들어갔을 때 뱉은 말들이 우리의 진심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린 의식적으로 그 사람이 취해있을 때 뱉어내는 것들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런 인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의 마음에 정착해 있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부정한 나의 모습들이 종종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솔직함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알지 못한 모습들이 숨어 문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욕구하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이미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춰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과거에까지 다시 차근히 돌아가 보며 지금 내가 결핍되어있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아마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도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결핍된 욕구를 보살펴 과거가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만들자.
길고 길었던 어둠의 시간이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어김없이 증발했다. 내리쬐는 태양빛이 온 방을 비춰 눈을 가린 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어제 모든 혼돈을 초래했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의 역사가 기록된 기억의 존재 여부에 대해 물어보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니 그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몸 둘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며 이내 부리나케 도망치고 말았다.
과연 그들은 술에 취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알고 있었다면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욕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내적으로 존재하는 욕구를 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외부로 드러냈고 그것으로 인한 자유로움이 정신적 희열을 주어 일종의 환각 작용을 일으켰다.
우리에겐 모두 욕구가 존재한다. 식욕, 수면욕, 성욕을 제외하고도 소유욕, 지배욕 등 개인적인 경험들로 인해 축적되어온 불만들이 외치는 욕구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러한 욕구들은 모두의 마음속 한켠에 자리하고 우리가 빈틈을 보일 때만을 잠자코 기다린다. 화가 나거나, 술에 취해 감각이 마비되는 등의 일이 발생하면 팽팽하게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어지며 묶여있던 욕구들이 자유롭게 망망대해를 헤엄칠 수 있게 되고 한 번 이것을 손에서 놓치면 다시 낚아 올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을 투자해 스스로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연구의 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감정 또한 이성 안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어낼 수 있다. 욕구를 앞세워 모든 결정들을 단번에 내리던 무지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유려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본능을 채워주는 의식의 몸집을 키워 적절한 균형을 조절하며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세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불꽃이 타오르는 잠깐 번쩍이는 현상에 모든 감정을 녹여내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모든 규율들을 깨고 원초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만약 모든 개체와 현상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간의 앞뒷면을 모두 관찰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웬만한 일들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조용히 부는 바람이 지구 반대편에 죽음을 초래할 수 있듯이 우리의 행동과 발생되는 사건들 또한 크나큰 잠재적 영향력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야 한다.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우리의 정신이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지, 그 정신에 의해 육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