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 타인을 보며 자신을 마주하곤 한다
마크 로스코를 경험한 적 없이 그에 대해 읽었다.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의 저자는 마크 로스코의 아들이자 작가, 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로스코다. 그는 30여 년간 아버지인 마크 로스코의 유산을 관리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를 탐구해 왔다. 즉 이 책은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와 함께 하는 마크 로스코에 관한 대화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경험한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다.”
- 마크 로스코
나는 여러 사람이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우는' 경험을 한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할 것 같으면서도 어려워 보인다. 그림 안에 담긴 역동성으로 작품과 관객이 공명하는 이 경험의 순간이 수차례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 그 그림 안에 무언가 있음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나는 마크 로스코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끝끝내 내 앞에 서 있던 것은 마크 로스코도 그의 그림에 대한 심오한 비밀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내밀한 감정을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나도 과연 그럴까? 그의 그림을 보면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낄까?' 하는 마음들이 뒤섞인 채 책을 읽다 보니 나는 어느새 그의 그림 앞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언의 공명을 경험했다. 비어있는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가득찬 듯한 그림들과 자꾸만 입 안으로 굴리게 되는 감정의 단어들.
사실 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관객들과 같진 않아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중학생 무렵 아버지와 함께 유럽 여행을 갔던 때였다. 하루는 빈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 갔었고, 나는 그때 다른 그림에 매혹되었다. 클림트의 <키스>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그림.
그건 바로 에곤 실레의 <에두아르트 코스마크의 초상>(1910)이다. 에곤 실레에 대해 전혀 몰랐음에도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땐 그림 속 남자가 총을 쥐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마치 총구를 바닥으로 향한 채 두 손으로 꽉 쥐며,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곧바로 장전할 것만 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어깨는 어딘가 위축되어 보였고, 두 손은 다리 사이로 숨겨 안정감을 찾으려는 듯했으며, 얼굴에 담긴 건 의심의 눈빛처럼 보였다.
나는 그 초상화 앞에서 왠지 모를 끌림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다시 그림 앞에 섰다. 당시의 나는 그 초상화 앞에서 내가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불안'을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망치고 싶다는 감정은 나의 현재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회피의 마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에곤 실레가 이 그림을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기에는 변화를 겪으며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곤 하고, 나는 그때 나의 감정과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한 초상화가 나의 내면을 콕콕 찔러보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려 했지만 다시 이끌리고 말았던 경험. 이는 그림이 끌어낸 반응이자 대화일 테다.
마크 로스코는 끊임없이 그림을 통해 '인간'과 대화하고 마주하길 노력한 사람이다. 그 형식은 변화해 왔어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일관되어있다. 즉 로스코는 작품에 '인간'을 담았다. 더 나아가 인간의 불완전성을 담았다. 마크 로스코의 목표는 관객에게 '접촉', '마주침', ‘영혼 혹은 마음과의 대화’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주침은 마치 거울 같은 초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초상화는 정말 말 그대로의 초상화가 아니다. 앞서 말한 에곤 실레의 초상화 작품에서 겪었던 나의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을 통해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함께 말하는 것과 같다.
"로스코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간을 그린다. 그가 당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일까? 만약 로스코의 그림이 당신처럼 보이거나 정말 당신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는 내면의 초상화와도 같다고 느껴진다. 추상화는 관객이 직접 능동적으로 작품과 세계를 들여다보고 탐구해야 하는 수고가 들어간다. 그렇기에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마주할 때 누군가는 감동이나 경이를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불편함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이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누군가는 작품에 적극적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 보는 방식과 닮아있다. 어떤 이는 내면을 탐구하는 걸 불편해한다. 그러다 누군가 정곡을 찌르듯 나의 내면을 향해 말을 걸어온다면 더더욱 그 대화를 거부해버리고 도망친다.
나 또한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 말해보자며 말을 걸어온다면 나도 모르게 저 멀리 달아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하길 노력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이 좋다. 같은 대화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마크 로스코의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 정서는 결국 내면으로 향하는 초대를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2077)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