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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의 사색과 담백한 빙수 - 안경(めがね, 2007)

매해 같은 초봄에 모일 것을 알기에

by 유랑

날이 선선해질 때면,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면, 그리고 누군가 그리워질 때면 찾게 될 영화가 생겼다. 바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めがね, 2007)>. 관광할 곳도 놀 만한 곳도 없이 그저 사색할 뿐인 조용한 바닷가 마을. 이곳에는 매해 봄마다 마을을 찾아와 수수께끼 해변 앞 빙수 가게를 운영하는 사쿠라 씨와 마음씨 좋은 하마다 펜션 주인 유지, 매일같이 두 사람을 찾아오는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하루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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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모두 사색하기 위해 초봄 즈음에 이곳에 온다는 것. 전파가 터지지 않는 곳으로 훌쩍 떠나기 위해 무작정 찾은 곳이 이 마을이었던 타에코.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기 바쁘다. 아침마다 자신의 방에 조용히 들어와 깨워주는 사쿠라 씨가 부담스럽고, 매일 아침 해변에서 다 함께 모여서 하는 메르시 체조에 끼는 것도 달갑지 않다. 그렇게 타에코는 사람들의 권유를 모조리 거절하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이곳 사람들은 담백하다. 타에코가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수긍하고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것도 잠시, 어딘가 작은 소동이 지나고 타에코는 점점 이 마을에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색하길 시도하다 포기해버리곤 했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사색 방법으로 시간을 즐기고 마을 사람들과 잔잔하게 교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매실과 빙수의 상관관계


“매실은 그날의 화를 면해준다.” 유지는 매일 아침 식사하며 작년에 담가둔 매실장아찌를 먹는다. 그 매실을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매실과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얻게 되는 것들. 급할수록 체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러한 매실장아찌와 비슷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사쿠라 씨의 빙수다.


사쿠라 씨의 빙수는 보기엔 평범하다. 달콤한 팥앙금을 그릇 바닥에 깔고 그 위로 간 얼음을 산처럼 쌓는다. 그다음 맑은 설탕 시럽을 위로 뿌려주면, 빙수 완성이다. 그러한 빙수를 한 입 맛본 타에코는 음미하면서 어딘가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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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씨의 빙수는 무엇이 그리 특별할까. 이곳 사람들은 사쿠라 씨의 빙수가 인생 최고의 빙수라 말하고, 유지는 타에코에게 한 번쯤 먹어보는 게 좋다고 권할 정도니 말이다. 사쿠라 씨의 빙수 비법은 팥앙금을 만드는 그 과정에 있다. 앙금을 졸일 때 조용히 그리고 느긋하게 지켜보다 때가 되면 불을 끄는 것이 바로 그 비법이다.


즉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매실과 빙수에는 공통점이 있다. 매일 아침 먹는 매실장아찌와 빙수의 심장과도 같은 팥앙금은 모두 오래,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다. 하마다 펜션을 운영하는 유지도 자신은 사색보단 이곳에서 기다릴 뿐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이처럼 ‘기다림’이란 단어는 어딘가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충만한 느낌을 준다.


기다리면 어김없이 봄이 돌아올 것이고, 그립던 누군가가 다시 이곳의 바다로 올 것이다. 그럼 묵혀둔 매실장아찌를 아침마다 꺼내먹으며 무탈한 하루를 빌고, 오후에는 해변 앞에서 빙수 한 그릇을 비울 테다. 그러한 믿음으로 기다리면 얻게 되는 것들은 무척이나 따스하고 안락하다.



안경, 그리고 안녕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안경을 끼고 있다. 안경은 초점을 맞춰준다. 흐릿했던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사색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정리되는 면이 있다. 안경의 도수가 조금만 달라져도 시야가 변하는 것처럼 타에코도 낯설고 불편한 이 마을에 대한 도수를 점점 맞춰가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식사 자리에도, 메르시 체조 시간에도 끼게 되며, 좋아하지 않던 빙수를 먹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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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 사쿠라 씨가 다시 훌쩍 떠나고, 타에코도 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장면이 있다. 그때 거센 바람으로 타에코의 안경이 저 멀리 날아가지만 타에코는 잠시 놀랄 뿐 차를 멈춰 세우거나 안경에 대한 미련을 갖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경은 유지의 낚싯줄에 걸려 올라오게 된다. 마치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안경은 그렇게 마을에 남겨진다. 그리고 예상대로 다음 해에 먼저 마을에 도착하여 사쿠라 씨를 반기는 타에코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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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구름과 잔잔한 바다처럼 흐르듯 살아가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지나가는 비행기 한 대를 보고 “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어떠한 관계일까. 각자의 사정은 모를지라도 같은 안경을 쓰고 이곳을 그리워하며 돌아올 것을, 매해 같은 초봄에 모일 것을 알기에 그렇게 작별할 수 있는 관계는 그 어떤 매실과 앙금보다 특별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사쿠라 씨의 빙수 같을지도 모른다. 사쿠라 씨는 매번 빙수값을 얼음, 아이가 접은 종이, 채소 등 사람들이 주고 싶은 것들과 교환해 왔다. 들어간 재료는 특별한 것 없고 어딘가 심심할지도 모르는 빙수임에도 자꾸만 손이 가는 것. 물질적이고 계산적인 것들을 나누기보단,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그 담백한 빙수와 닮아있다. 빙수의 계절 여름이 점점 흘러가고 날이 선선해지는 요즘, 산책하며 사색에 사로잡히기 쉬운 이 계절에 한 번쯤 맛보면 좋을 영화 <안경>을 추천해 본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365)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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