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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디가 아픈 거예요?

by 짱강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더럽지만, 대충 주워섬겨 기어야 하는 세상의 진리이다. 그런데도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럴 돈이 부족한 본인을 탓해야 한다고 세계적인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 너무 많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고, 여름의 세상에선 그랬다. 여름은 돈으로 때울 수 없는 부분에만 구멍이 숭숭 난 인간이었다.


돈다발부터 들고 모태의 뱃속에서 꺼내지는 새 생명은 없다. 우리 모두는 탯줄을 매개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인간의 것으로 설계된 세포를 새긴 채로 자라날 뿐이다. 그만큼 인간의 태초는 초라하고 무력하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인간의 태초와 함께 자라나는 게 존엄성이다. 존엄성은 돈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돈을 뱉을 수도 없다.


안타깝게도, 아직 채 완성되지도 못한 여름의 존엄성은 짓밟혀야 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지속적으로, 악질적이게도, 고차원적으로 짓밟혀야 했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존엄성을 짓밟는 작자들이 흔히 '어른'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기약받지도 못한 기한 내에서 여름은 처참히 짓밟혀야 했고, 그럼에도 도움을 청해야 했고, 어른들의 바짓자락을 부여잡아야 했다. 신도 믿지 않는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거라곤 본인보다 인생을 몇 년 더 산 인간의 한 가생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름은 존엄성이 무참히 붕괴된 세상에 순종하고 숨쉬는 법을 체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죽지 않고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여름은 그 세상에 발을 들이니 차라리 죽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사고가 난 날을 기점으로 여름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일단, 아무도 없는 집안을 미친 사람처럼 쓸고 닦아댔다. 1월의 한파에도 집안의 창이란 창은 다 열어두고 살인의 흔적을 지우듯, 그녀는 헌신적인 면모까지 보였다.

사고 흔적들이 여기저기 살아 숨쉬는 것 같아서 못 살겠어요 역겨워요. 실제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여름은 이렇게 답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넋을 놓고 있거나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를 탕진했다. 애초에 여름은 누군가와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도 그랬으나, 신체적으로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실어증에 가까운 상태를 보였다. 간간이 난독증 상태가 되기도 했다.

물리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 상태가 도드라지곤 했다. 여름은 지금 아파요? 물어 오는 의료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분명 그렇다고 답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난처하기만 했다. 그래서 입이 억지로 열릴 지경의 강도로 치료를 해야, 그제서야 아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물리치료가 끝나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곧장 집에 갔다. 심지어 그녀의 가족들이 해당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같은 층에서 몇 걸음만 더 가면 웃으며 반겨줄 같은 처지의 핏줄들이 있는데도 곧장 집에 갔다.

오늘 병원 왔는데 왜 우리 안 보고 갔어? 따뜻한 목소리를 머금은 엄마가 전화를 걸어 왔음에도 여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 정적을 넘어선 침묵에 통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엄마는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간 딸에 이내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게 아닌데. 다 설명해야 하는데. 여름은 끊어진 전화를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여름은 줄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그것도 집에서. 단독주택도 아닌 아파트에서. 본인의 방에서. 여전히 집안의 창문은 다 열어 놓은 채로. 보일러따위 꺼 놓은 채로.

그렇게 잠에 들 시간이 되면, 그녀는 이미 침대에 짱박아둔 몸을 옆으로 눕힐 뿐이었다. 그렇게 한 20분쯤 흐르면, 그녀는 발작을 하듯 벌떡 일어났다.

그 장면. SUV에 택시가 궤멸되는 장면. 파열음에 귀는 찢어질 것 같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는 장면. 모두가 죽어가는 신음을 흘리고, 여름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목숨을 구걸하며 울부짖는 장면. 알 수 없는 탄내와 고성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그 장면. 그 일련의 장면들이 기괴하게 봉합되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녀의 꿈에 침범했다. 불안에 잠식된 그녀는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켜고 해가 뜨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 아침의 느즈막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그녀는 그제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마치 태양과 교대를 서듯 그렇게.



그렇게 1월의 마지막 주쯤에 가족들이 모두 퇴원을 했다. 그럼에도 여름은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구태여 생각해 보면, 달라진 게 한 가지 있긴 했다.

가족들이 퇴원해 집에 온 이후로 그녀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2-3시간도 자기 힘들어하던 인간이 17-18시간씩 자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 1시에 잠들어 해가 저무는 오후 5시에 깨는 일상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동안 내가 불안해서 잠을 못 잤었기 때문에 안정이 된 지금에서야 잠을 몰아 자기 시작한 거구나 할 뿐이었다. 그런 일상이 하루이틀, 한 달 이상 반복이 돼도 본인의 일상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여름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감상평을 내놓는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거니까, 일상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살기만 하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다 해결될 거야. 말아먹은 입시는 돈으로 때우면 된다. 재필삼선이 하나의 슬로건이 된 세상에서 여름은 정상성을 목표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서서히 죽어가기를 택했다. 정상성에 본인을 욱여넣고, 끝없이 자책하고 자학하며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머금었다.

잠도 줄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본인이 이상한 것이기 때문에.



2월 달에 등록한 재수 종합 학원은 달에 1-200씩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요구했다. 거기에 교재비, 급식비, 기타 등등까지. 정말 돈을 처바르면 안 될 것은 없었다. 적어도 입시는 그랬다.

모두에게 감사해요

부모님께서 N수를 시켜줄 금전적 여유가 있었기에 여름은 매일 아침 5시 20분에 일어나 밤 10시 30분에 귀가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잿빛 건물 속 잿빛 강의실들이 당시 여름을 채우던 세상의 전부였다.

그나마 토요일엔 자습을 진행한다는 이유로 오후 6시에 학생들을 풀어주곤 했다. 당시 여름은 단체 자습날인 토요일과, 자율 자습날인 일요일 속에서 숨쉴 틈을 찾곤 했다.


재종 학원에서 짐을 빼던 날. 비참했다.

그럼에도 적응을 못했다. 그래서 제 오빠가 다니던 동네 독학 재수학원으로 짐을 옮겼다.

어쨌든 재수학원이었기에 전에 다니던 학원과 일과는 비슷했지만, 가까운 통원 거리 탓에 아침 7시까지 잘 수 있다는 점과, 선생님들이 프리하다는 점과, 마음에 드는 인강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그녀의 숨통을 조금은 트여 줬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댔나, 여름은 그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반박까지 한다.

씨발 없긴 뭐가 없어요 나한텐 있었어. 그럼 된 거야. 도망이 최선이고 그래야만 하는 삶에게 그딴 멍청한 말 마요. 도망쳐도 낙원은 있고, 뒷걸음질 쳐서 밟은 땅에도 구원은 있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마요. 내가 봤다는데 왜 지랄이야.



독학 재수학원에서의 나날들. 운 좋게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망가진 추억은 힘이 세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나름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싸우고 버티던 나날들과 9평. 유독 국어에 약했다. 지금 보니, 한여름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하원하던 차와 직접 싼 점심 도시락과 권용기쌤. 구굴게이 잊지 마세요들.


사실은 너무 두려웠다. 두렵고 불안하고 의심이 됐다. 그래서 여름은 학원을 옮기던 첫날, 플래너에 한 문장을 써내렸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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