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N년 차 비정형 우울병자가 알려주는 민간요법
예.. 뭐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일어나죠. 저는 안타깝게도 그 모든 일을 한국 나이로 20살이 되자마자 벼락치기로 맞아야 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그리고 우연히, 또 공교롭게 제 성인으로서의 새 시작은 아주도 엿같았습니다.
그렇게 너무 어린 나이 (당시 만 18세)에 휘몰아치는 세파를 떠안던 저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잠을 너무 많이 자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로 자냐, 오전 1시에 잠들어서 오후 5시에 깨는 수준이었습니다. 기억해 보면, 중간에 깨지도 않았습니다. 화장실 갈 때를 포함해도 최대 2번 정도 깼던 것 같네요. 겨울이라 욕창이 안 생겼습니다. 다행.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개운했느냐?
아뇨, 너무너무너무너무 피곤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기력이 모두 빨려나간 느낌. 몸을 일으키는 게 무슨 유격 훈련급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엔 최소한의 할 일만 해 두고 침대에 누워 있었네요. 하하.
그리고 한동안 말이 제대로 안 나왔습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고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연습 삼아 신문을 낭독도 해 봤습니다. 정해진 대본을 읊기는 쉬웠습니다. 그러나, 숫자를 읽는 데서 막혔습니다. 10250이었나. 아무튼 그런 숫자가 있었는데, 순간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까먹었습니다. 만이천오백, 만이십오 등, 엉뚱한 숫자만 읊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저를 보며 왜 그러냐며 웃었습니다. 왜 그러냐는 질문 자체도 굉장히 가벼웠고, 웃긴 상황 정도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이 반복되고, 말이 줄어서 점점 멍해지고, 멍해지니 반응도 느려지면서 스스로 심각성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그냥 피곤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많이 자는 거겠지' 하던 생각도 흐릿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웬만하면 제게 참견하지 않는 가족들마저도 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결국 할머니께서는 저를 데리고 정신과에 가셨습니다. 의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내 기분 상태나 기타 등등을 알렸습니다. 당시엔 제대로 된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으나, 그냥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습니다. 그렇게 이 모든 게 우울증 증상이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정신과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그 분야 자체가 제겐 생소했기 때문에 모든 게 서툴렀습니다. 약을 잘못 복용해서 하루종일 메스꺼웠던 것도 당연한 거라고 치부(진짜 맹구 같다)해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우울증 데뷔 연차가 쌓이며 병원도 옮겨 보고, 스스로 약을 선별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과 약에 해박해집니다.
어느 기점부터 정신과에 가기 귀찮아서(왕복 2시간+대기 1시간+@) 임의로 단약을 합니다. 뭐, 임의로 단약을 하면 증상이 더 악화될 수 있다, 용량을 천천히 줄여야 한다, 큰 부작용이 올 수도 있다 등등 많은 말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제 우울증은 언제나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고, 울다 지쳐 잠드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우울로 먹칠된 날들이었죠 뭐.
그러다가 현재 정신과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엔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정신과에 갔습니다.
당시엔 약도 효과가 없다는 걸 체감했고, 워낙 많은 의사들을 만나다 보니 그로 인한 심적 고통과 상처도 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대충 병원 다니는 척만 하면서 중간에 내빼야겠다, 어차피 이 사람은 내 얘기를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다, 하며 첫 상담을 합니다.
하라는 검사를 다 하고 나니, 중등도 비정형 우울증과 불안장애라는 정확한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이젠 병명이 지겨울 정도였고,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피곤하다, 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첫 상담 때 피실피실 웃던 기억이 나네요. 의사 선생님껜 매우 무례한 태도였지만, 정말 내 인생 ㄹㅈㄷ 하며 듣는 제 상태는 그저 어이가 없었습니다. 치료할 마음도 없었고요.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야~ 가 제 모토였습니다.
왜 웃어요?
선생님의 질문에 제 인생이 ㄹㅈㄷ라서요. 올타임 레전드라서요. 할 순 없어서 그냥 웃음이 난다고 얼버무렸습니다.
두 번째 상담이 있던 날,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 선생님은 두 번째로 보는 저를 간파해 버리셨습니다. 이제껏 만나 본 의사들은 동태 눈깔로 그래 돈은 냈으니 네 얘기를 들어 보자꾸나. 듣고 나니 너는 우울증이구나. 우울증 증상으로 그런 기질이 발현될 수도 있고, 어쩌구저쩌구 한 달 뒤에 보자. 하는 인간들이었는데, 선생님께선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제 얘기를 구체화하며 제 심리를 간파해 버렸습니다.. 솔직히 그때부터 조금은 희망이 생겼달까요. 포기하고 있던 마음의 문제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자주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제 얘기를 많이 하게 되고, 선생님께서는 그걸 또 다 이해하셨고.. 다시 생각해도 참 신기하네요. 선생님이 번창하셔서 이 동네에 뼈를 묻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 지긋지긋한 친구들과 동거를 하기 시작하며 만성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최근에는 몸까지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만사 무기력 인간이 되었습니다. (진화 완료) 조금만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잠부터 오고, 하루종일 죽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고,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싶어졌습니다.
다른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이 무기력이 도질 때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도 없이 죽고 싶을 만큼 피곤해지니까요.
처음엔 이 피곤함을 정신력으로 타파(...)하고자 했지만, 역시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만성 피로를 있는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결론은 일단 해야 하는 일을 최소한만 하고, 자자. 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은 덜 괴로워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매우 피곤한 상태이고,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내키는 것부터 해놓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요즘 무기력해질 때면, 식욕을 잘 못 느낍니다. 분명 배는 고픈데, 너무 고픈데 뭐부터 어떻게 나를 채워야 할지 감이 안 옵니다. 그래서 음료수로 배만 채워내고 잠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귀찮은 게 아니라 힘들어서 밥을 못 먹는 상태가 오는 거죠. 보는 이로써는 안타까울 수도 있겠으나, 저는 그냥 단순하게 생각 중입니다. 요즘 밥값도 비싼데, 식비 아끼고 좋지 뭐. 하는 좌절적 긍정회로를 돌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알바를 하다가 가끔씩 손님이 '왜 맨날 이렇게 기력이 없어요?' 해도, 원래 그렇다며 웃어 넘기곤 합니다. 치열한 삶을 버리고 나니, 불안감도 해소됐습니다.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괴로워하며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살아갈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요. 그러니 무기력과 공생하는 제 인생을 응원해주세요. (응원금 보내 달라는 말 아님) 힘이 날진 모르겠지만, 따뜻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