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 맞듯.. 회사에서 잘리다

20년간 몸 바친 회사가 나를 차버렸다

by 카리스마회사선배

[퇴임 통보 후 3일.. 그 생생한 아픔을 기록하다]


임원의 끝은 초라한 퇴임이다. 후배들의 따뜻한 환송과 기념패 따위는 없다. 도망치듯 짐을 싸고,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집으로 달려간다. 힐끗 돌아본 회사는 을씨년스럽게 우뚝 서 빨리 꺼지라고 호통친다.


회사에서 정년까지 가는 경우는 생산직, 기술직 일부 외에는 거의 없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고성과를 내도.. 이유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특히, 임원은 더하다. 퇴임통보를 받으면, 바로 다음 날부터 회사를 나갈 수 없다. 수십 년간 이른 시간에 익숙해진 몸뚱이는 어김없이 새벽에 번쩍 눈을 뜨게 하지만,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막막할 뿐이다. 인생 젊은 날을 모두 불태워 회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어도 직장인의 끝은 모두가 같은 모습이다.


나도... 참 많이 아팠다... 20년간 근무한 회사가.. 아무 준비도 안 된 나를 무참히 버렸다. 어제까지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 헤어지자고, 네가 싫어졌다고 차갑게 돌아선 것 같았다. 퇴임 통보를 받은 그 날 이후 3일.. 생생한 심경변화를 적어 보았다.



2019년 12월 26일 14시 퇴임통보 첫째 날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안 좋은 일인데, 이번에 ㅇㅇ님을 퇴임시키기로 했어." 대표님의 말에 가슴이 '툭'하고 내려앉았다. 식도에 있던 무거운 쇳덩어리가 자이로드롭을 탄 듯 순식간에 대장까지 쿵 떨어진다. 대표님의 말이 윙윙거린다. 높은 산에 오른 듯 귀가 멍멍해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못 지켜줘 미안하다고..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나쁜 새끼.. 이용만 했구나.. 남들이 다 욕해도 충성을 다 했건만, 그 어려운 신사업을 혼자서 악착같이 론칭해 냈건만.. 저 혼자 살고, 헌신짝처럼 버렸단 말인가.. 토사구팽...


갑자기 목구멍에 뜨거운 눈물이 차 오른다. 쿨하자. 멋있게 떠나자. 괜찮다고, 미안하실 필요 없다고, 그동안 많이 배웠고, 감사했다고도 했다.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분노와 배신감에 온몸이 떨렸다. 아..... 이런 거였구나. 평생을 바친 회사에서 잘렸을 때 느낌이 이런 거였어. 선배들이 겪었던 퇴임통보, 나한테도 일어나는 일이었구나..


일분일초도 회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모든 직원들이 나만 쳐다보는것 같았다. 꼴 좋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비서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갈 데가 없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집으로 향했다. 혼자 집 지키던 강아지는 철없이 뱅글뱅글 돌며 좋아한다. 강아지가 켁켁거리도록 꼬옥 안아줬다. 막상 집에 오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친 거 아냐? 나 같은 인재를 놓치고 잘 되나 보자.'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2019년 12월 27일 퇴임통보 둘째 날

"참을 수 없는 슬픔, 분노, 배신감"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꿈이 아니구나. 왈칵 눈물이 흐른다. 아프다. 가슴속에 피가 철철 흘러넘친다. 아프고 또 아프다. 남편과 아이들이 슬슬 내 눈치를 살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침을 먹었다. 목이 멘다.


정말 나가기 싫은데, 신입사원들이 열심히 준비한 송년회 날이 하필 오늘이다. 그 가상한 노력을 알기에 차마 취소하지 못했다. 하루 사이 전사에 소문이 났다 보다. 여기저기서 위로 문자와 톡이 울린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면 지는거야. 당당히 떠나자.


송년회 말미 마무리 멘트를 하면서 그 다짐은 와르르 무너졌다. 구성원 한 명 한 명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폭풍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저는 대학 졸업 후 하루도 쉬지않고 최선을 다했고, 20년을 이 회사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 마지막 3년을 여러분과 함께 해서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이 간단한 멘트를 하는데 삼분이상 족히 걸린 것 같다. 1층까지 배웅 나온 후배들을 보면서 또 울고, 집에 가는 운전대를 잡고는 대성통곡했다. 회사에 기여한 게 얼만데. 통보 한 번으로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나보다 무능하고, 나보다 일 안 하고, 정치만 하는 임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슬프고, 분하고, 억울하다.


2019년 12월 28일 퇴임통보 셋째 날

'자기 비하'


또 일찍 눈이 떠졌다. 수십 년간 새벽 5시부터 시작된 일상에 몸은 당연히 익숙해졌을 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최선다해 일했고, 성과도 냈고, 작년엔 승진까지 하지 않았던가?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성과를 더 내야 했나? 골프를 잘 못 쳐서? 정치를 못 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쁜 일은 손을 잡고 오나 보다. 오빠는 3개월 전에 폐암 말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노쇠한 엄마가 오빠를 간병하기 위해 우리 집에 와 계셨다. 요양원에 있는 오빠만 보고 오시면 쓰러지시는 연로한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막내딸마저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을 도저히, 도저히.. 못 하겠다.


출근하는 척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어디서 하루를 보내야 하나? 엄마한테는 하루하루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된 걸까? 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아버지도 퇴임 때 이렇게 아프셨나요?' 공무원 생활 30년 후 퇴임하신 아버지가 혼자 쓸쓸히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보고 계신가요? 너무 보고 싶어요.' 뭉툭한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시며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우리 막내딸 자랑스럽다고 말해 주실 것 같다. 올려다본 겨울 하늘이 쏟아질 듯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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