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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별하 Jan 08. 2024

내 안에 고래가 산다

"어릴 적 꿈이 뭐였어요?"

사람들과 좀 친해지면 내가 잘 묻는 질문이다. 기억을 꺼내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는 사람, 그 얼굴 표정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무채색 얼굴이 금방 비가 개인 하늘처럼 맑고, 생기가 넘친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행복하다. 분명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꿈을 따라 걸어왔다'

꿈은 누구나 꿀수 있고 이룰 수 있다. 단,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일에 때가 있는 것 처럼 꿈도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온다'는 표현도 좋을 듯 하다. 살아오면서 누구나 흔하게 듣는 말이지만 정작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때가 온다'는 이 문장이 내것이 되려면 스스로 체득해야만 한다. 

한 번, 두 번 체득하다보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든다. ' 이걸 미리 알았다면 내 꿈은 좀 더 크고  높아도 좋을 뻔 했다'는 것을. 어쨌거나 나는 그 꿈을 따라 따라 걸어왔다.


'내 안에 고래가 산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고래가 산다는 걸 모르고 산다. 대개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꿈 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긴 바다를 본 자만이 바다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넓은 바다를 보여 줄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내 안에 고래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한 치 앞을 모르고 사는게 우리 인생이다. 재개발된 길건너 논밭을 미리 사두었더라면 나는 아마 벌써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후회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란 것도 없다. 내 인생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었다. 앞으로 또 꿈을 꾸면 된다. 


'기억하는 꿈의 시작'

기억이 나는 내 꿈은 20대, 대학을 졸업 할 무렵부터 시작된다. 그때 나는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야겠다 단단히 맘 먹고 최대한 꾸미고 다녔다.  그리고 직장을 가져야 겠다 생각하고 공무원 시험공부도 했다. 둘다 바람대로 이루었다. 시험을 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일하는 여성도 되었고, 나름 사회적 위치를 가진 집안의 둘째 며느리도 되었다. 안정되게 출발을 했지만 직장은 결혼하여 4년을 넘기지 못하고 육아문제로 그만 두었다. 전업주부가 되어 3년 터울로 둘째 셋째를 낳았다. 유교 교육을 철저히 받고 뼈대있는(?) 집안에서 자라온 우리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게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남편 잘 받들고 시어머니께 잘 해드려야 한다. 그래야 네가 복을 받는다.' 그 말씀대로 며느리로 아내로 나를 지우며 조신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눈에 씌인 콩깍지가 떨어지고,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이러다간 내 인생이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답게 살아야겠다' 결심했다. 결혼 후 8년쯤 되어서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최대의 바다'

 "나는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고 싶고, 그 후에는 화가나 작가가 될거야."

어느날 놀이터에서 아이의 그네를 밀며 동네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그릴 수 있는 최대의 바다였다. 시대는 좋은 대학 나와, 시집 잘 가서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내조 잘하며 편하게 사는 것이 성공한 여자의 표본이었던 때다. 나와 기질이 다른 동네엄마는 내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그게 그리 쉽나?'라는 뜻으로 비춰졌다. 내 말에 믿음 없어 보이던 그녀에게 나는 보란듯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보여주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한 동화구연으로 동네 이름난 문화센터에 동화구연 강사가 되었던 거다.  운이 좋았다. 윤여사의 인생이 신나게 발동이 걸린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꿈으로 시작 되어 닥치는대로 살기'

아이를 키우면서 문학 공부도 시작했고 3년간 시를 공부했다. 그후 아동문학으로 바꾸었지만, 시는 내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고 밑천이다. 시낭송가가 되어 시극에 참여하기도 하고, 행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참여 시키기도 했다. 동화구연가로 비영리단체에서 수많은 도서관 봉사와 공연을 했으며, 오랫동안 문화센터에서 아이들 수업과 성인 동화구연 제자를 기르기도 했다.  마을 소출력방송국에서 5년간 자원봉사로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하고 사단법인 단체의 회장이 되어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내 안의 커다란 구멍을 메꾸려고 늦깍이 대학원 공부도 마쳤다. 처음에는 꿈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다음은 내 앞에 주어진 일이기에 닥치는대로 해치우며 살았다.


'우연한 행운?'

우연히 어린이 전집출판사에 발탁되어 기획자로 3년간 일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많은 그림책을 만들었고 1년은 스스로 지원하여 차를 몰고 직판점 관리도 했다. 40대 아줌마가 회사의 차를 몰고 첫 출장지 부산을 가던 때가 생각난다. '여자가 밥이나 하지. 차를 몰고...' 성차별 발언이 난무하던 시대다.  도로가 복잡하고 운전 문화가 험하기로 소문 난 부산 출장에 얼마나 마음을 쫄았던지. '부산 도로'라 인터넷에 검색하기도 하고 부산에 사는 두 명의 친구에게 묻기도 했다. 한 친구는 소문대로 험하고 장난이 아니라했다. 한 친구는 웃으며 조심해서 운전하면 괜찮다 했다. 둘다 맞는 말이었다. 그후, 가까운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서울, 청주, 인천, 파주, 동두천까지 출장을 다녔다. 역마살이 있는지 차를 몰고 다니는게 적성에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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