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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Feb 24. 2023

여보! 시간이 흘렀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한국 사람들은 복수를 좋아한다.

오랜만에 독한 감기에 걸렸다. 콧구멍을 타고 흐르는 액체로 인해 후각을 잃고 점점 뜨거워지는 체온으로 인해 미각도 잃었다. 그리고 그런 내 앞을 막은 자칭 간병인 남편 키가주니는 오늘도 쉬지도 않고 재잘거렸다.


"이번 감기 독하다 정말 내가 대신 걸리면 좋을 텐데.."

"뭐래? 저리 떨어져!"


계속 나에게 감기를 옮겨달라는 그의 행동이 아이러니했다. 학생 때야 학교에서 조퇴하기 감기 걸린 친구를 쫓아다녔었지만, 조퇴 없는 버스회사에 다니면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날 새벽 출근이기 때문에 적어도 5시간 이상은 자야 한다며 매일 밤 10시가 되면 나를 버리고 들어가는 신데렐라와 같은 그의 모습은 오늘은 밤 10시 30이 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연이은 재채기 성 기침으로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쯤 그는 내가 못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말을 뱉었다.


"여보.. 시간이 흘렀다고 잊히는 건 아니잖아.."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의 말에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무려 3년 전 남편이 심한 감기가 걸려서 앓아누웠을 때가 있었다. 나는 가능한 전염성 강한 그 감기를 피해 잠복간호를 했지만 여지없이 걸리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 감기를 전달하고 증세가 호전된 남편에게 당신 때문에 감기가 걸렸다고 원망이 섞인 저주들을 퍼부었고, 그는 아직은 자신이 더 아프다며 같이 병원 가서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렇게 병원 상담창구에서 등록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 병원은 신기하게 대기실 의자에 앉으면 원장실과 주사실이 붙어있어서 두 개의 나무 문이 보이는 구조였다. 그렇게 내가 먼저 원장실에 들어가 상담을 받고,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고 나왔다. 다음은 남편의 차례였기 때문에 나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원장실 문이 열리고 남편이 주사실로 향하는데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환자분은 주사 안 맞으셔도 돼요"


그 말을 들은 남편의 억울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키는 191에 눈은 억울한 듯 울먹거리며 눈썹은 위아래로 흔들렸고 입술은 오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얼굴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요? 제가 더 아픈데 저는 왜 주사를 안 줘요?"


주사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는 남편의 얼굴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병원에 오는 내내 차 안에서 자신이 더 아프다고 말하고 온 남자에게 간호사님이 정신을 차리라고 병원비를 정산을 할 때 한번 더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니까 환자분은 주사를 안 맞으셨으니까 오천 원 부인분은 주사 값 포함 만원 정산하시면 됩니다. 부인분 열이 많이 나니까 집에 가시면 얼음찜질 좀 해주세요"


얼굴이 더 붉게 타오르며 돌아온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고 나는 그런 남편을 하루종일 놀렸었다.


"것봐 내가 더 아프잖아ㅎㅎㅎ 아까 너 억울한 표정 장난 없더라 사진 찍고 싶었는데.. 하하하"


그렇게 남편은 3년 묶은 기억을 땅속에 묻고 복수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내가 감기를 걸릴 때를... 하지만 그의 복수는 오늘도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다행히 독했던 감기가 그에게 가지 않고 일주일 동안 머물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주사를 맞을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한 남편이 주방에서 김치볶음밥을 만들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놓쳤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마음속 상처가 잊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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