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
밴쿠버의 올 여름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엄청나게 더웠다고 하던데, 이곳은 이상하게 온도가 높지 않고 흐린 날도 더러 있어서 8월부터는 얇은 외투를 챙기고 다녔었네요. 이번주 부터 갑자기 기온이 확 떨어져서 이제 여름옷을 입고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는 요즈음 입니다.
한국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겠지요. 가을은 쓸쓸한 계절입니다. 낙엽이 지고 쌀쌀해지고, 해도 짧아지는 그런 계절이지요. 이번엔 그런 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영화 입니다. 한국에선 그닥 성공하지 못했던 영화지만 굉장히 좋은 영화였고, 그것을 반증하듯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았었지요.
주인공인 케이시 에플렉의 성추문때문에 다소 빛이 바랜 영화긴 합니다만, 케이시 에플렉의 연기도 뛰어났고 조연들의 연기 역시 아주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특히나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녀의 눈물 연기는 뭐랄까, '저게 정말 연기로 가능한 감정일까?'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리얼했었거든요.
영화 전반(全般)을 채우는 무겁고 쓸쓸한 감성이 과하지도 부족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이야깃 거리를 가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에 보면 좋을 것 같은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케이시 애플렉이 연기한 '리 챈들러'입니다. 그는 보스턴에서 잡부로 일하는 남자입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그는 그런것에 관심이 전혀 없어보입니다.
그는 매사에 의욕이 없고 다소 공격적인 사람이지요. 그러던 어느날, 형의 비보를 듣습니다. 그리고 리는 고향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이하 맨체스터-'로 돌아가게 되지요.
리의 형인 '조 챈들러'는 리에게 유서를 남깁니다. 자신의 아들, '패트릭 챈들러'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리에게 보호자가 되달라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리는 형의 유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는 맨체스터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플래시 백을 통해 과거의 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서서히 보여줍니다. 그는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한 '랜디'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었고 아이를 3명 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집에서 놀다가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TV를 보면서 맥주를 마십니다. 맥주가 떨어진 리는 편의점에 가게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집이 통째로 불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추울까봐 편의점에 가기 전, 장작을 벽난로에 넣었지만 차단막을 설치하지 않아 장작이 밖으로 굴러나왔고 그것이 화재로 이어진 것이죠. 아내인 랜디는 무사히 탈출 했지만 2층에서 자고 있던 아이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경찰조사 결과 리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지만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경찰서에서 자살시도를 하고, 결국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스턴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죠.
리는 형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시에 패트릭을 보스턴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맨체스터에서 살 수 없기에, 패트릭의 보호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보스턴으로 데려가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패트릭은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기에 보스턴으로 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둘 사이엔 감정의 골이 깊어집니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이 메워지고, 리 역시 삶의 희망을 얻는다는 것이 영화의 전체적 줄거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 '구원'의 키워드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 이르렀을때도 리는 끝내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는 맨체스터에서 살지 않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며, 패트릭의 보호자가 되는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리와 조의 친구였던 '조지'에게 패트릭을 입양해달라고 부탁하고, 조지는 그것을 승낙하여 패트릭이 맨체스터에서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지요.
다만 몇몇 사건들을 통해 리는 구원을 얻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영화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가진 인물이 둘 등장합니다. 리와 그의 와이프인 랜디이죠. 영화의 현시점에서 랜디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와는 달리 삶의 이유를 찾고 상처를 모두 치유한 것으로 보이지요.
과거의 아이들을 잃어버렸던 비극이 비록 리의 자의가 아니었음에도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에, 그녀는 리를 증오했었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저주를 그에게 퍼부었었죠. 하지만 맨체스터로 돌아온 리를 바라보는 랜디의 시선에 증오나 분노는 없습니다. 그녀의 시선엔 오히려 동정과 미안함, 반가움이 가득하지요.
랜디는 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리는 랜디를 피합니다. 하지만 극의 최후반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랜디와 리. 그리고 랜디는 솔직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때 그 사건은 당신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어, 그때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안 됬는데. 미안해."라는 말을 꺼냅니다.
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랜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리는 자리를 뜨게 되지요.
구원을 얻기 위해선 몇몇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는 '용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스스로 용서함으로써 그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구원의 희미한 빛이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낮에는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별들이 해가 지고 밤이되면 눈에 환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작중 랜디는 리에게 사과를 합니다. 자신이 퍼부었던 저주와 심한 말들로 인해 상처받았을 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죠. 하지만 리는 랜디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랜디가 리와 달리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그녀가 리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리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녀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리에게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를 함으로써 리가 가진 부채의식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랜디는 자신의 사과를 통해 망가진 리의 삶이 어느정도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쨋건 리는 아이들의 비극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랜디가 리에게 한 사과가 그의 부채의식을 덜어줄 것이라 생각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남들의 시선이 어떻던간에 그녀의 사과는 진심이었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이 시퀀스를 통해 랜디는 리를 용서함과 동시에 자신이 행했던 행동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요. 하지만 리는 그녀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랜디와 달리 리는 아직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닥친 끔찍한 사건, 그 일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에 대한 타인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타인의 진심어린 사과와 용서의 메세지가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수도 있겠습니다만, 리는 랜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바로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랜디와 만난 이후로 리는 패트릭과 관계가 원만해집니다. 패트릭이 냉장고 문을 열고 냉동닭을 보고 눈물을 흘렸을때부터 이긴 했지만, 랜디와의 만남 이후 형이 남긴 총을 팔고 보트의 엔진을 고치면서 둘 사이의 무드가 본격적으로 따듯해집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둘이지요. 리에게 있어 패트릭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삶에 의욕을 잃은 그는 패트릭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의 유언을 마냥 등 돌릴수 없었던 리는 패트릭을 보스턴으로 데려가려하지만 패트릭은 극구 거절합니다. 그는 친구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영화는 영리하게도 중간중간 리의 형인 조 패트릭이 리를 얼마나 잘 보살폈는지를 보여줍니다. 맨체스터를 떠나고 자리잡은 곳에 가구를 넣어주고 그에게 끊임없는 위로와 지지를 보내주지요. 리는 그런 형의 유산인 패트릭을 잘 대해주려고 노력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고나서 리는 패트릭에게 마음을 엽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맨체스터는 고통의 도시이기에 그는 끝내 패트릭의 곁에 남아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제든 보스턴으로 놀러오라고, 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겠다며 이야기를 하지요.
리는 패트릭과 함께 하면서 삶의 의지를 다시 되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보일러 배관을 고치다가, 자신과 형을 잘 아는 노인을 만나 "자신의 아버지는 어느날 참치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날은 날씨도 좋았는데. 그런거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리를 향한 위로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잃은 건 불의의 사고였지,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리를 향한 무심한 위로였던 것이지요.
리는 패트릭이 아니었다면 형의 장례를 최대한 빨리 마치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맨체스터에선 타인의 따가운 시선과 자신의 부채의식 때문에 살 수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패트릭과 함께 맨체스터에서 지낸 시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겐 삶의 의지를 되찾고 자신을 용서하며 또 새로운 삶을 살 용기를 얻을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선 표현하지 않지만 보스턴으로 돌아간 리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것 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삶을 열심히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거든요.
언젠가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맨체스터로 돌아왔을 때 랜디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녀 또한 용서할 것 입니다. 그럼으로써 랜디와 리는 과거의 끔찍한 사건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요.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의 무대가 되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그곳은 리에겐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도시입니다. 아이들의 죽음과 그로인한 죄책감이 가득한 곳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형의 죽음으로 다시 돌아온 맨체스터에서 리는 패트릭과 랜디를 통해 죄책감을 덜고 희망과 삶의 의지를 얻었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구원을 찾을 힘을 얻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극적인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펙타클하거나 사람의 감정을 마구 뒤흔드는 영화는 아니지만, 진실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잔잔하고도 명확하게 전달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