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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Oct 10. 2024

명작 다시 읽기 - 라쇼몽(羅生門)

추악한 인간들,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요전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의 '난징의 그리스도'라는 단편을 소개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아쿠타가와 선생의 작품 몇 개를 짤막하게 소개드렸었는데 오늘은 그때 언급한 작품'들'을 한 번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아쿠타가와 선생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라쇼몽'이라는 단편이지요.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고, 서브컬처 쪽에서도 특이한 이름 덕분인지 자주 인용 내지 사용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영화의 원작이기도 하죠.


 바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을 원작으로 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입니다.



 이 영화는 1950년에 만들어진 고전 중에 고전인 영화로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분입니다. 199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고 그때 무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구로사와 선생을 부축하며 시상대에 올라갔지요.


 두 분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엄청난 팬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또 구로사와 선생의 작품들이 전 세계 영화에 큰 영감과 자취를 남긴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라쇼몽이라는 영화도 유명합니다만 셰익스피어의 멕베스를 일본풍으로 바꾼 '거미집의 성'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의 적극적인 투자로 만들어진 '꿈', 그리고 무려 60여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 리메이크 작품이 나오는 '7인의 사무라이'등도 아주 유명합니다.


 구로사와 선생의 영화는 저작권이 만료된 오래된 작품들이라 흑백영화에 영화적 문법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지금의 스타일과 맞지 않을뿐더러 러닝타임이 2시간 혹은 1시간 반이 넘어가는 영화들입니다만,


 그래도 보다 보면 '옛날 영화가 이렇게 흡입력이 있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랄까, 구로사와 선생의 혼이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옛날 영화라 거부감이 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보다 보면 생각보다 꽤나 재미있습니다. 저작권이 만료돼서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있고요.


 사실 위에서 언급한 거미집의 성이나 7인의 사무라이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구로사와 선생의 영화 중에선 라쇼몽을 가장 좋아하고 또 사랑하기에 먼저 이 작품을 소개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나무꾼과 승려가 라쇼몽이라는 대문 아래에서 장댓비를 피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무꾼은 계속 "그럴 리가 없다"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죠. 그러다 한 남자가 뛰어들어옵니다.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무꾼에게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쇼."라고 하지만 나무꾼은 입을 다물 뿐입니다.


 그리고 승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소. 그건 기근, 화재, 전란보다 더 무서운 일이오."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그리고 나무꾼은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할 테니 셋 중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당신이 말해주시오"라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사흘 전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시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관아로 가서 신고를 하지요. 이후 시체를 발견한 나무꾼, 그전에 부부를 만났던 승려는 관아로 가서 사건에 대한 진술을 합니다. 그리고 '다조마루'라는 도적이 잡혀오죠.


 그는 산에서 젊은 부부를 만났고, 아내를 보자 욕정이 일어 남편을 제압해 나무에 묶고 아내를 범합니다. 이후 남편을 죽이지 않고 떠나려는 찰나, 아내가 갑자기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이야기했으며 그래서 자신은 남편을 죽이고 자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이후 아내와, 죽은 남편을 빙의한 무당이 관아로 불려 들어와 진술을 하게 됩니다. 이들의 진술은 다 조마루의 이야기와 큰 맥락은 같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영화는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리송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라쇼몽'이지만 사실 영화의 주된 내용인 '한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의 전혀 다른 진술들'이라는 아이디어는 라쇼몽이 아닌 '덤불 속'이라는 다른 단편집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영화 라쇼몽은 액자식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액자의 틀 부분만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영화 라쇼몽은 원작 라쇼몽에서 장소와 주제의식을 빌려왔을 뿐, 정작 이 작품이 유명해진 계기인 액자 속 내용은 덤불 속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영화가 두 원작을 가지고 와서 절묘하게 섞으면서 두 단편의 주제를 완결된 한 편의 영화로 완벽하게, 아니 더 훌륭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원작을 읽어본 사람 입장에선 '라쇼몽'이 그 모든 공을 가져가는 게 조금 아쉽긴 하더라고요.


 워낙 영화가 유명하다 보니 '라쇼몽 기법'이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원작을 아는 사람들에겐 뭔가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라쇼몽 기법이라기보다는 덤불 속 기법이 원래 맞는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원작에선 다조마루와 아내, 그리고 죽은 남편의 진술만이 등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셋의 진술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고 끝이 나지요. 하지만 영화에선 또 한 명의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 증인의 증언을 보기 전에 짧게 셋의 증언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다조마루의 증언입니다. 그는 아내를 범한 후에 떠나려 했지만 아내가 자신을 따라가려 했다고 이야기하지요. 자신은 남편을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간청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일련의 멋있는 격투 후에 자신의 칼로 남편을 죽였지만 아내가 그대로 도망가버렸다고 이야기하지요.


 다음은 아내의 증언입니다. 그녀는 다조마루에게 욕보이고 남편의 옆에서 흐느낍니다. 다조마루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버리죠.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위로해 줄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녀를 역겹다는 듯이 노려 불 뿐이었죠.


 그래서 가지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남편을 풀어주고 은장도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녀를 무시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자신이 남편을 은장도로 찔러 죽였다고 이야기하죠.


 마지막으로 죽은 남편의 증언입니다. 다조마루는 아내를 범한 후 그녀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아내는 다조마루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자신을 어디든 데려가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요.


 다조마루는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아내가 남편을 죽여달라고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있다면 자신들이 행복할 수 없다고.


 그러자 다조마루는 아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아내를 죽일지 살릴지 남편에게 정하라고 말합니다. 정이 떨어져 버렸다고요. 그리고 다조마루는 남편을 풀어주고 자리를 떠나버렸고 아내 역시 떠나버립니다. 남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내의 은장도로 자결했다고 이야기하죠.




 이렇듯 다조마루, 아내, 남편은 같은 사건을 두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만을 할 뿐입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 진실에 가까운 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지요. 


 원작에선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끝을 내면서 인간의 악함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선생은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증언을 하나 가지고 옵니다. 그럼으로써 영화의 주제의식을 원작이 담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듭니다.


 바로 나무꾼의 증언이지요. 그 역시 관아에선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습니다. 자신은 시체를 보았을 뿐,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몰랐다고요. 하지만 실제로 그는 사건이 일어난 순간을 보았습니다. 이제 나무꾼의 증언을 보도록 하지요.


 다조마루는 아내를 범한 후 그녀에게 같이 떠나자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녀는 대답대신 자신의 은장도로 남편을 풀어줍니다. 이후 다조마루는 남편과 아내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며 싸움을 포기하지요.


 그러자 아내는 다조마루와 남편을 도발해 싸움을 붙입니다. 결국 둘은 검을 뽑아 들고 싸우지만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서로 도망만 다니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여주죠.


 졸전 끝에 다조마루는 아내의 은장도로 남편을 죽이지만 아내는 다조마루에게서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조마루 역시 남편이 가지고 있던 검을 들고 도망가버리죠.


 나무꾼이 자신이 보았던 것을 관아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남편의 가슴팍에 박힌 값나가는 은장도를 훔친 범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지요.





 이전 '남경의 그리스도' 소개에서도 짧게 언급했듯 아쿠타가와 선생의 삶은 밝지 않았기에 선생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삐딱합니다.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 선생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소적입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선생이 세상을 보는 시선은 굉장히 따스합니다. 영화 라쇼몽을 추악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그러한 인간의 구원으로 마무리 짓거든요. 


 영화 초반, 승려가 이야기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소. 그건 기근, 화재, 전란보다 더 무서운 일이오."라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승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을 위해 남을 깎아내리고 진실을 숨기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세상에 살아가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을 한 것처럼 보이죠.


 영화는 비록 관아에선 사실대로 고하지 못했으나 끝내 사실을 이야기하고 죄를 뉘우치는 한 사람, 나무꾼을 등장시킵니다. 그 역시 앞서 등장한 세 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위증과 은장도를 훔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언젠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고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메시지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나무꾼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세 명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따라가니 그곳엔 갓난아기를 버리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남자는 아기를 감싸고 있는 옷을 가져가려 하고, 나무꾼은 남자를 나무랍니다.


 하지만 남자는 "네가 나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넌 관아에서 위증을 했고, 그 값나가는 은장도를 훔친 사람이잖아."라고 대꾸하죠. 남자는 옷을 가진채 나무꾼을 비웃으며 사라지고, 승려는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 달랩니다.


 나무꾼은 승려에게 아이를 달라고 하지만 승려는 나무꾼을 믿지 못해 아이를 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무꾼은 "이미 여섯 명의 아이가 있지만 7명도 키울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고 승려는 그런 나무꾼에게 사과를 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영화는 막을 내리죠.


 마지막 시퀀스는 원작 라쇼몽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현실과 그런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하지만 구로사와 선생은 영리하게도 그곳에 원작과 조금 다른 설정을 추가합니다.


 갓난아기의 존재이죠.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갓난아기의 존재를 무시하고 옷을 훔쳐 달아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죠. 하지만 나무꾼은 갓난아기를 키우려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보이죠. 혹은 라쇼몽의 끔찍한 세상에서도 인의를 지키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원작 라쇼몽보다 영화 라쇼몽이 제게 와닿았던 것은 아무리 끔찍한 세상이라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세상일지라도 그걸 바꾸는 건 결국 인간 우리 자신. 인류애를 잊지 말자는 메세지가 아주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원작 라쇼몽의 이야기가 현실적이다. 양심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나도 양심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화 라쇼몽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저도 그 생각엔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비록 나무꾼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려는 꿈이나 의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휴머니티(Humanity), 즉 인류애를 잃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를 가여워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상대에게 자선을 베풀고, 또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 감동을 받는 것처럼. 또 그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세상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원작 라쇼몽보다 영화 라쇼몽이 제게 더 크게 와닿았던 까닭은


 "악한 세상에서 나만 마냥 선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린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잘못을 저질렀어도 마지막 남은 양심 하나만큼은 지키려는 나무꾼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는 구로사와 선생의 메세지가 나무꾼의 마지막 행동을 통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모든 것을 해도 된다. 설령 그것이 인의(仁義)를 넘는 일이라도.' 이것은 제가 책이나 영화를 접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전 작품의 수위가 어떻듯 작품의 장르가 어떻든, 수준이 어떻든 간에 화자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전해진다면 남들이 싫어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혹은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개인적인 취향은 문제적 작품보단 그래도 영화 라쇼몽같은 다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작품이 더 좋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아무리 팍팍하고 정신적인 가치보단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는 세상이더라도 그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필히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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