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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야감 Sep 23. 2024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42문장

약 한 달 전쯤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왼쪽손 약지를 말입니다. 손바닥 쪽에서 보았을 때 손가락 가운데마디 아랫면부터 왼쪽면으로 칼에 베었습니다. 요리 중에 말이죠. 그런데 보통 요리 중에는 손가락 위쪽을 잘 다치는데 어쩌다 여기를 다쳤을까요? 쓸데없는 요리동작을 해서 그랬습니다. 조리병 시절부터 수많은 칼질에 단 한 번도 손을 다치지 않았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일요일 저녁으로 카레를 먹으려고 마트에서 고형카레를 사 왔습니다. 거기에 일전에 쓰고 남았던 고형 카레를 추가로 넣기로 했습니다. 문득 왠지 큰 덩어리를 작게 썰어 넣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 풀어질 거 같아서요. 구입하지 얼마 안 된 새까만 세라믹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왼손 위에 얇은 플라스틱 위에 담긴 고형카레를 두고 칼로 조심스레 썰어보려 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탓에 겉 부분 수분이 날아가 약간 딱딱하여 칼이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순간 칼끝에 조금 힘을 주어 카레를 써는 순간, 부드러운 고형카레 속을 통과하고 얇은 플라스틱 용기를 가볍게 썰어내며 칼날이 제 손가락까지 닿고 말았습니다.


"아악!"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손가락에서는 피가 솟구쳤고 순간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에서 요리를 지켜보던 와이프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씻었는데 1cm가 넘는 긴 상처부위에 빨갛게 배어 나오는 피 줄기가 쉽게 멈추지는 않겠구나라고 짐작했습니다.


"응급실 가야 할 거 같아?"

"응"


신기한 것은 1년 전에 친한 친구 와이프가 이것과 매우 유사하게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친 과정을 듣고 그 광경을 워낙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서인지, 그 모습이 나의 버전으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당황하진 않았고 손가락에 통증도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수건으로 손가락을 감싼 채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여 1시간 정도 대기하고 진료를 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좋지 않은 부위기에 지금 꿰맬 수 없으며 다음날 전문병원에 방문하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좋지 않은 부위'라는 표현은 후시딘과 대일밴드로 해결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갔다는 의미였으며 제 머릿속에 장애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응급실에서 처치한 손가락

잘 지혈되지 않는 손가락을 처치하고 자주 가는 식당에서 와이프와 순두부 국밥을 먹었습니다. 식사 후 집에 돌아가 끓이고 있던 카레용 야채를 불길한 기분에 다 버리려 했으나 막상 아까운 생각도 들었고, 이 정도로 불길함을 느끼는 나약함이 싫었습니다. 붕대 두른 손을 어색하게 들고 하던 카레를 마저 마무리하였습니다. 손가락을 다친 개수대와 인덕션 위 카레 냄비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냄비 가장자리에 피 한 방울이 튀겨있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선지카레를 마무리하고 소분하여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살인사건 현장 같은 피 튀긴 주방을 와이프가 열심히 닦았습니다. 영화 황해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그때 발견 못한 핏방울이 주방 여기저기서 가끔 보이곤 합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 사고순간을 여러 번 되돌려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러지 말걸이라는 후회보다 그 순간 무언가에 씐 듯이 그런 동작을 했던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장애'라는 단어를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삼키고 삼켰습니다. 그래봐야 손가락 하나니까라는 생각에 닿을 때쯤 잠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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