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빨강머리와 원형탈모

by 김소연



#13. 빨강머리와 원형탈모





빨강머리와 원형탈모




_ 머리에 브릿지 두세 줄 정도 넣으면 예쁠 것 같아요.



헤어디자이너는 내 정수리의 머리를 군데군데 한 움큼씩 쥐어 보였다. 그곳은 평소에 내가 다니던 곳이 아니라 번화가에 있는 유명 미용실이었다. 역시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스타일링까지 해주는구나, 조금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반곱슬보다 조금 더 곱슬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서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주 미용실에 다니지만 내게 염색을 권한건 그가 처음이었다. 최고의 튜닝은 순정이라고, 아니 그것도 빨강 머리라니 머릿결이 더 상하면 어쩔까 걱정을 했지만, 헤어디자이너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려 어느덧 내 머리는 빨강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실 나는 붉은 계열의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 내가 색을 선택했다면 초록색이나 파란색이었을 거다. 하지만 군가가 무얼 권유한다면 나는 거절할 재간이 없다. 단호하지 못한 말투와 불안정한 내 눈빛을 보면 아마 누구라도 원하는 걸 이뤄낼 거다. 나는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아이였다.





프로포즈_김희선_나의 빨강머리시절스타일_머리스타일만;;





미용실을 나오면서 손에 든 계산서를 보며 다시는 이 미용실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와인 빛이 도는 빨강머리는 내게 참 잘 어울렸다. 브이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어디에서나 튀는 머리스타일로 나는 조금 문제아처럼 보였던 거다. 그즈음에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하필 정수리 한가운데에 오백 원 동전보다 큰 원형 탈모가 생면서 나의 불량한 외모는 더 빛을 발했다. 머리숱도 별로 많지 않지만, 머리숱이 많다 해도 도무지 가릴 수가 없는 위치였다.






빨강머리와 원형탈모는 어울리지 않아




빨강머리와 원형탈모는 어울리지 않는다. 보통의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들이라면 진한 화장도 빨강머리도 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몸에 딱 붙는 옷도 향수도 뿌리지 않아야 한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다 구겨진 얼굴 표정으로 세상 시름을 다 가진 어두운 얼굴빛이어야 하는 거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내 머리를 탈모가 아니라 몸싸움의 흔적쯤으로 여겼고, 나를 보며 수군댔다. 도무지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띄는 건 원형탈모보다 빨강머리였다. 내 머리가 빨강이 아니고, 추레한 츄리닝 따위를 입었다면 아마 영구로 보였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동네 바보 영구가 아니라 싸움짱이 더 화제성이 있었다. 그나마도 직접적으로 내게 물어보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주로 뒤에서 뒷담화로 이뤄졌다. 직접적으로 내게 물어야 대답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나는 어디서 머리채나 잡히고 다니는 일진 양아치였다. 언젠가 언니와 함께 간 다른 미용실에서 언니는 큰 소리로 "소연아, 여기 미용사 언니들이 너 머리채 잡고 싸운 거 아니냐고 얘기하는데?"라고 말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언니는 그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 미용사는 곧장 내게 와서는 저분이 당신의 언니인 줄 몰랐다는 황당한 사과 비슷한 걸 했다.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아도 그녀를 변호할 만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말은 아무리 좋게 들어보려 해도 네가 듣지 않는다면 우리끼리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의미인 게 확실했다. 나는 그 이후에 누군가의 뒷담화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게 오히려 내 사회생활에 더 문제가 되었다. 뒷담화를 하지 않는 대신 앞에서 뭐든 다 말하는 그들이 원했던 진정한 싸움짱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라고




부분 자기가 이미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생각을 바꾸길 꺼려한다.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큰 소리를 수록 그러니까 머리채나 잡히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라고 말할수록 점점 더 맞는 게 되어간다. 세상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맞는 게 아닌 게 되거나, 아닌 게 맞는 게 되거나 그렇게 변해간다. 아이가 카페에서 커피를 쏟아 당황하는 '82년생 김지영'은 그 사람이 여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맘충 김지영일뿐이었다.



최소한의 자기를 변호할 권리는 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타인과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신은 절대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없다. 빨강머리를 해도 원형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고, 우울증에 걸려도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