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이제 사치재다
얼마 전 오은영 박사가 방송에서 했던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자식은 생산재였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식은 소비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딩크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 있을까. 이 차가운 경제학적 정의가 내가 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는지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답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윗세대에게 자식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자산이었다. 농사지을 일손이 필요했고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올 노동력이었으며 늙고 병들었을 때 나를 부양해 줄 유일한 보험이었다.
그때의 양육비는 저렴했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그만이었고 형의 옷을 동생이 물려 입으며 컸다. 즉 투입 비용은 낮고 기대 수익은 높은 꽤 괜찮은 생산재였던 셈이다.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은 다르다. 지금의 자식은 철저한 고비용 소비재다. 그것도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최고급 사치재.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돈 먹는 하마가 입을 벌린다. 산후조리원 영어 유치원 사교육 대학 등록금 결혼 자금 지원까지. 아이 하나를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억 단위를 가볍게 넘긴다.
반면 기대 수익은 제로에 수렴한다. 내 자식이 커서 나에게 생활비를 줄 확률은 희박하고 오히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들을 뒷바라지하지 않으면 다행인 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선택은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한다.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매달 숨만 쉬어도 나가는 고정비는 무겁다. 이 빠듯한 자원을 마이너스 수익률이 확정된 투자처에 쏟아부을 수 있을까.
대치동 학원가에 줄지어 선 외제차들을 본다. 그들은 자식이라는 소비재에 기꺼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명품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소득 구간에서 아이는 감당할 수 없는 사치다. 내 밥값 9천 원을 망설이는 내가 수억 원이 들어가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건 경영학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누군가는 묻는다. 어떻게 자식을 돈으로만 계산하냐고. 가족 간의 사랑은 숫자로 매길 수 없다고. 맞는 말이다. 사랑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위대한 사랑도 카드값과 대출 이자라는 현실 앞에서는 힘없이 바스라진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속담은 틀린 적이 없다.
나는 내 주제를 안다. 나는 이 고비용 저효율의 시대를 버텨낼 재력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소비를 멈추기로 했다.
우리는 아이라는 사치재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 부부의 노후와 현재의 안정이라는 실속을 챙기기로 합의했다. DNA에 새겨진 본능은 여전히 낳으라고 속삭이지만 내 머릿속의 계산기는 멈추라고 경고음을 울린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나는 본능보다는 계산기를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