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본질에 머무르는 힘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채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더 많이 아는 척, 이미 해본 척, 언제나 괜찮은 척.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조금 더 그럴듯한 얼굴을 꺼내 드는 일이, 익숙한 생존 방식이자 생활양식이 되어버린 탓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혹은 덜 불안해지고 싶어서 우리는 자신을 포장하는 데 적지 않은 힘을 쏟으며 살아간다.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각각의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얼굴이 필요하다.
회의실에서의 전문적인 표정, 관계 속에서의 매끄러운 말투. 이런 역할들은 때로 우리를 보호하는 가림막이 되어주기도 한다.
문제는 그 역할이 잠시 머무는 얼굴이 아니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태도가 될 때 발생한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 2>에서 우승한 최강록 셰프가 보여준 장면은 그래서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결승의 정점에서 그는 자신을 ‘조림 인간’이라 칭했다.
“지금껏 대단한 셰프인 척, 멋있는 전문가인 척하며 나 자신을 속이고 살아왔던 것 같다. 조림은 결국 시간이 흐르며 재료 본연의 맛이 우러나오고 섞이는 과정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 ‘척’을 내려놓고 가장 나다운 요리를 완성한 것 같다.”
최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자신이 해온 ‘척’을 고백하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그 장면은 우승 그 이상의 깊은 잔상을 남겼다.
이런 '척'은 아주 사소한 순간들에서 시작된다.
모른다는 말을 입안으로 삼키는 일, 확신이 없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일. 그 순간에는 별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지만, 그런 선택들이 쌓이면 말은 실제의 나보다 저만치 앞서가고 마음은 자꾸만 뒤처지게 된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여도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과도한 힘이 들어간다. 멈춰 서 있어도 어딘가에서 계속 애쓰고 있는 듯한 묘한 피로감이 남는 이유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사람이 가장 불안해지는 순간은 실제의 자기 모습과 이상적인 자기 사이의 간격이 커질 때”라고 했다.
척하는 삶은 그 간격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넓힌다.
우리가 느끼는 원인 모를 무력감은, 어쩌면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척하지 않는 태도는 대단한 용기라기보다,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에 가깝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도 관계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의 모자람과 서툴음까지 포함해서 그것이 온전한 나라는 인정 말이다. 그 믿음이 뿌리내릴 때 사람은 굳이 자신을 과장하려 들지 않는다.
척하지 않는다는 건 모든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다만 불필요하게 자신을 부풀려 전시하지 않겠다는 담백한 선택에 가깝다.
그 선택은 말을 줄이게 하고, 관계를 덜 소모적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준다. 계속해서 긴장한 채로 자신을 감시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평온한 감각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역할의 커튼 뒤에 진짜 내가 여전히 숨 쉬고 있느냐다.
조금 덜 설명하고 조금 덜 증명한다고 해서 삶의 궤도가 어긋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애쓰지 않는 태도 안에서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척하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덜 흔들리기 위한 뿌리 깊은 선택이다.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면 굳이 소리 높이지 않아도 마음은 조용해진다. 그 조용함은 계속해서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제는 숨을 골라도 좋다는 신호처럼 다가온다.
자기 자신을 입증하느라 숨이 가빠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그 고요함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지켜주는 가장 단순하고도 단단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