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대성당 앞.
내 몸만 한 8kg 배낭을 메고 도착한 그날,
나는 오래된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나를 껴안았다.
히치하이킹을 처음 해보고,
물집과 피멍이 든 발로 하루 30km 넘게 걷고,
국경을 발로 넘는 순간까지.
내가 살아오며 해보지 못했던 모든 경험이 이 길 위에 다 있었다.
사실, 이 길을 걷기 직전의 2년은 내게 깊은 고독의 시간이자
삶 전체에 실망감을 느끼던 시간이었다.
나름 애써 이뤘던 일들,
목표로 여겼던 커리어와 위치들이
어느 순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고,
나 스스로도 자꾸 실망스러워졌다.
‘나는 왜 늘 이렇게 헤매는 걸까?’
‘내가 문제인 걸까?’
그런 자책이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되던 시기였다.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정말 내가 원하는 곳인지조차 헷갈렸고,
계속 달리다 보니 결국 탈이 난 것이다.
무엇이든 '지속'해보고 싶어서, 걷기
나는 이 길에서 처음으로 한 가지를 꾸준히 해보고 싶었다.
누구의 기준이나 요구가 아닌,
오롯이 나만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결국엔 나 자신을 믿어도 된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다시 믿게 된 두 가지 배움
순례길이 끝난 지금 돌아보면,
이 길은 나를 ‘채우기 위해’가 아니라 ‘비우기 위한 길’이었다.
이 길 위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내 몸은 이미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
문제는 내가 그걸 믿지 않았다는 거였다.
내가 아끼고 존경하는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따뜻하고 단단하게 믿어주면서,
정작 내 마음과 감각은 계속 의심해 왔다.
이제는, 나를 더 잘 믿어주기로 했다.
그게 내가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이 될 거라 믿는다.
둘째,
속도보다 방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
한 번은 마을을 하나 더 가보겠다고 계획보다 욕심을 내다
결국 알베르게(숙소)를 찾지 못해
예정 거리의 두 배를 걸어야 했던 날이 있었다.
물은 떨어지고,
핸드폰 배터리도 꺼졌고,
지도도 볼 수 없었다.
지금 이 길이 맞는 건지,
앞으로 나아가는 건지 도는 건지
혼란스럽고 막막했지만,
결국 나는 도착했다.
제자리걸음처럼 보여도, 포기하지 않으면 도착한다.
나는 늘 시간과 돈, 효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빠르게 달리는 법만 익혔던 사람이다.
그런데 결국 나는 그 속도에 갇혀 방향을 잃고 있었다.
나를 되찾기 위해 천천히 걸어야 했다.
이제는 조금 느리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삶을 살고 싶다.
다시 헤맬지도 모르고, 또 다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믿는 방식’부터 달라졌으니
이전과는 다른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 시간들이
어쩌면 가장 좋은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한참 흔들릴 때 필요한 건
완벽한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믿고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 길 끝에서 내가 가장 먼저 껴안은 사람도,
그리고 가장 많이 토닥여준 사람도
결국 나 자신이었다.
앞으로의 내가 더 기대되는 이유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나답게 살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길 위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