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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꼬 Dec 11. 2019

가발을 맞추던 날

난 준비성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 날,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그 날, 외래조무사는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과장님,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말을 줄인다. 병리과 과장님이 친히 전화를 주셨고 미리 언지를 줬으면 판독을 일찍 해 줬을 건데 첨언까지 하시며 아~주 상세히 판독소견을 설명해 주신다. 어쩌구저쩌구해서 예후가 좋을 타입이란다. 오십보백보. 결론은 똑같다. 악성이다. 암.


조직검사를 할 때부터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 설마 그렇게 내가 재수가 없진 않은데 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지만 현미경에 암세포가 보였다는데 어떻게 그 결과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목록을 만들어 보았다.

결과의 수긍 - 주치의 선정 - 치료법에 대한 고민 - 내 주변 일상의 정리 - 치료 과정에 대한 학습


지방대학이긴 하지만 의대를 나온 덕에 결과를 받아들이고 주치의를 선정하고 치료법을 논의해서 결정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일주일 정도의 기간에 모교병원에서 병기결정등을 위한 정밀검사를 받고, 서울의 모병원(혹시나 모를 경우 서울에서 치료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 있다는 엄마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방문했었다)에서 진료를 하고, 선행항암치료를 위해 모교병원에 입원을 했다. 항암제 투약을 위한 중심정맥관(케모포트)를 심고 바로 1차 항암치료까지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해치워버렸다.

이제 다음 항암까지 시간이 생겼다. 아직 몸은 아무렇지도 않다.

퇴원후 출근해서 스케일링을 부탁함으로 항암치료의 부작용들에 대비하기를 시작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항암제가 있고 지금도 다양한 신약들이 연구중일 것이다. 하지만 특정암에 효과가 있다고 명백히 알려진 항암제들은 종류가 제한적이며, 그 중에는 탈모를 유발하는 약제들이 많다.

내가 받아야 할 치료중엔 아드리아마이신 일명 빨간 약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표적인 탈모유발약제이다. 첫항암을 마치고 다음날 방문한 가발가게에서 가발을 맞추고 나름 뿌듯해 했다.

나는 준비성이 대단한 사람이야. 훗

탈모 따위 가발로 감쪽같이 버텨줄 테야. 후훗


2주후 2차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했고, 병상 베갯잇에는 수북히 머리카락들이 얹혀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질때까지 기다리는게 아니라고들 했다. 그 과정이 힘들고, 두피가 따갑고 어쩌고 등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정작 나에겐, 일어날때마다 혹은 움직일때마다 머리카락 더미가 달라붙어 있는게 너무 싫었다.

퇴원후 그날로 가발가게로 가서 머리를 밀었다. 1센티 정도를 남기고 밀어버린 머리에 미리 맞춰놓은 가발을 쓰고 나왔다. 가발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때 민머리로 나와야 할 거 아냐? 뭐 이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고기를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모자도 많고 기성품도 많은데, 이 얼마나 바보같은 소리인가.


봄에 암진단을 받고 폭풍같은 항암치료를 거치고(2주간격으로 4회차) 초여름에 수술을 하고 나니 나의 민머리 시절은 대부분 여름이었다. 가발쓰고 외출한 건 다 합쳐 10번이나 될까 모르겠다. 왜 가발따윈 필요 없다는 얘기들을 블로거들은 안 하는가 말이다. 환우카페에 거의 사용하지 않은 가발이 중고로 혹은 무료나눔으로 올라올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 더운 여름에도 못 느끼다가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기니까 이런 생각도 들게 된다. 다만 가발을 준비하는 것도 일종의 의식이 되고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과정일 수도 있음에는 아주 찬성한다.

한동안 내 화장대에서 자리만 차지하던 가발은 이사후 어느 서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난 준비성이 대~단한 사람이고 만일을 대비해서 못 버리고 있다는 건 아직 식구들에겐 비밀이다.


참고로 탈모와 함께 나를 찾아와 괴롭히던 또하나의 복병이 있었으니, 콧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뚝! 하고 코에서 떨어지는 맑은 액체

처음엔 감기나 비염인 줄 알았으나, 듬성듬성해지는 눈썹을 보면서, 탈모가 머리카락에만 오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빠질 준비들이 되어 있었고, 모근이 약한 순서대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부위를 상상해도 다~ 빠진다.

왜 이런 것들도 블로거들은 안 적어 놨을까?

인간의 코 안쪽 점막에는 섬모라는 작은 털들이 있다. 섬모운동이라는 것을 해서 공기분자, 냄새분자를 이동시켜주기도 하고, 먼지 등 이물질은 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점막이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점액이 분비되어 촉촉하도록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부터는 나의 추측이다) 섬모도 빠지면서 수분을 잡고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수시로 콧물이 코끝에 방울방울 맺히거나 툭!하고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환우교육시간에 가보면 여기저기 훌쩍임을 볼 수 있는데, 내용이 슬퍼서가 아닌 건 확실하다.


내 이야기를 쓰기로 하면서 페이스북에 남겼던 그때의 기억조각들을 꺼내서 짜집기를 하게 된다. 여기저기 사정이야기하기 귀찮았던 나는 페이스북에 질밍아웃을 함으로 한번에 해결을 하기로 했었던 지라 조각조각 그 시절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이런 글을 올렸었다.


드디어 콧물이 멈췄다!!! 만세~
나쁜 주사약땜시 머리카락을 선두로 전신의 털이 다 빠지고 나서 경험한 생각지도 못한 불편감들...
콧털이 없어지면서 암데서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콧물이 뚝!!하고 떨어진다. ㅠㅠ
목안에도 섬모가 없어진건지... 자꾸 뭔가가 걸려서 켁켁 잔기침을 하게 된다.(기침하는 줄 알고 자꾸 걱정끼치게 되는...)
뒤통수에 땀은 또 왜 글케 흐르는지...
어쩔수 없이 가발 포기하고 손수건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뒤통수 훔치고 콧물 훔치고... 엄청 추접이가 되어 버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항암치료가 끝나고 머리통을 쓰다듬으면 솜털이 사부작사부작 만져진다. 아싸~!
그리고......
콧물이 멈췄다!

콧털은 정말로! 꼭! 필요하다.♡♡♡


하트가 무려 세 개라니 정말 기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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