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교사, 광무제와 유비, 삼국지 이야기
중국 역사에는 '지어냈다'고 할 정도로 믿기 어려운 대목들이 여럿 있다. 적은 군대로 수십배의 적을 격파한, '믿기 어려운 사실' 중에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곤양 전투"가 빠지지 않는다.
거짓말같지만 엄연한 사실들
곤양 전투: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 vs 왕망의 신나라. 병력 격차는 약 1만명 대 43만 (40배 차이)
호보답강 전투: 완안아구타의 금나라 vs 요나라(천조제). 2만 대 70만
사르후 전투: 누르하치의 청나라 vs 명나라(+소수의 조선군). 6만 대 30만
광무제가 한고조 유방의 9대손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전주 이씨 가문의 대한민국 국민 누군가가 '나는 왕족이오'라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다. 유수는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할 당시, 남양군 채양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신나라를 물리치고 다시 한나라를 건국한 뒤, 그 한나라(후한)가 200년 가까기 지속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곤양 전투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황제로 등극한 다음에 보인 정치이다. 30세 1조법, 노비 해방, 관직 통폐합, 상서대 강화, 흉노와 평화협상 등 그가 주도하여 펼친 정책들과 엄청나게 검소하고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하는 인성까지 겸비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사람은 미래에서 온 회귀자이거나 온 우주가 그와 함께하는 천우신조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광무제나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구타는 회귀자라고 믿고 있다;;)
제목을 삼국지라고 정해 놓고, 왜 광무제 얘기를 먼저 꺼내느냐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삼국지를 논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광무제가 세운 체제, 질서,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삼국지의 주자사, 태수, 현령이 어떤 지위인지 알기 어렵다. 광무제에 의해 정립된 유교 중심의 문치주의와 낙양의 태학을 알지 못하면 조조, 장막, 원소, 순우경 등이 이럴적부터 서로 알고 지낸 이유나 고향 탁현에서 돗자리나 짰다던 유비가 사실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중 하나로 꼽히던 노식의 제자였기에 황건적의 난때도 어렵지 않게 사람을 모을 수 있었다(=Branding이 가능했다)는 것도 알기 어렵다.
어릴적 삼국지 만화영화를 보면 유비가 시골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란 가난뱅이 일개 촌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비는 노식의 제자라는 유교적 배경(지금의 서울대 법대 출신)과 지역에서 꽤 이름 날리던 유협 (서울대 법대 출신이 지방 조직의 두목임)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간옹, 손건과 같은 오래된 부하들은 물론, 관우, 장비와 같은 당대 최고의 협객들이 그를 형님으로 모시고, 소쌍이나 장세평같은 상인들이 물밑에서 그를 지원한 것이다.
삼국지 초기 인물들을 이해하는 구도
네임드 유학자(사람 자체가 명문대): 채옹, 마융, 노식, 정현
그 아래 레벨 유학자: 공융, 화흠, 병원, 관녕, 최염, 모개
낙양파(질풍노도 금수저): 조조, 장막, 원소, 원술
영천파(경기권 전통 범생이): 순씨(순심, 순욱, 순유), 곽씨(곽가, 곽도), 신비, 정욱
기주파(충청권 범생이 & 대호족): 심배, 저수, 전풍, 견초, 국의
진짜 왕족: 유우, 유표, 유언(유장의 부)
서주/예주파(나름 근본있음): 장소, 장굉, 보질, 제갈근, 노숙
양주피(오월의 땅): 손견, 손책, 손권, 우범, 주치, 육손, 고옹
형주파(무시하긴 어려운.지방): 사마휘, 방통, 제갈량, 습진, 조루, 마량
익주파(산동네): 장송, 법정, 이엄, 비의, 장익, 마충, 초주
량주 출신(외노자): 이유, 가후, 마등, 한수, 마초
북방 군인 출신: 동탁, 여포, 장료, 고순, 공손찬
유협 출신: 유비, 관우, 장비, 감녕, 장패, 서황, 주태
흙수저 출신: 악진, 우금(문칙), 여몽, 등애, 위연, 왕평
한세대.뒤의 전통 명문가: 진군, 사마의, 양수
30년쯤 일찍 태어났으면 재밌었을 인물들: 두예, 왕준, 양호, 문앙
위와 같이 쟁쟁한 인물들이 득실거리던 시대(난세는 인재를 낳는다)에 유비는 '노식의 제자, 공손찬의 동문'이라는 후광과 '유주 지역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던 유협(무려 관우와 징비가 부하)'이라는 실제적인 무력을 동원하여 시대의 풍파에 저항하였다. 황건적의 난 때에는 스승 노식으로부터 덕을 보기도 했고, 동탁 집권기에는 공손찬 휘하로 가서 이름을 점차 알리면서 전투에 대한 감을 익히기도 한다.
반면 광무제 유수는 그가 직접 거병한 것도 아니고(형인 유연을 따라 거병함), 처음부터 세력을 독자적으로 구축한 것도 아니었으나(처음에는 녹림군 분파로 시작), 형이 어느 정도 키워준 세력을 물려받았고, 어릴적 동문 중에 최고의 전략가(등우)가 있었으며, 믿음직한 군사령관(오한), 불패의 선봉장(가복), 끝까지 충성을 다한 무장(왕패, 경암), 내정과 보급의 귀재(고손)가 있었다.
그럼에도 광무제 유수가 회귀자라는 의심은 변함없으나, 알다시피 증명할 길은 요원하며 스스로도 '가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어릴적 유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그가 어떤 사람을 닮고자 했으며, 온갖 역경(나관중 삼국지 전반부는 유비가 고생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을 극복할 때마다 누구를 떠올렸는 지는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정면교사. 누군가를 거울로 삼아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이 말을 매우 안좋아하며, 노자가 말한 '네게는 道이었던 것이 내게도 道가 되지는 않는다'는 격언을 신봉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주인공인 유수와 유비는 달랐던 듯 하다. 유수는 그의 시조인 유방의 길을 쫓은 듯 그 행보가 닮아 있으며, 유비는 비록 행보는 달랐을지언정 그 스스로 언급했듯이 광무제 유수의 길을 쫓았으니 말이다.
어짜피 서촉의 계한은 위나라에 의해서 망하지 않았나라는 소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유비를 한껏 치켜올려세우긴 했지만, 그의 시작을 보면 그에 비견될만한 인물들은 물론, 그를 넘어서는 인물들도 수두룩했다. 당장 원술을 보라. 사세삼공의 명문가 출신 적장자이다. 동탁 사후, 군웅쟁패 시대가 시작되었을 당시, 天下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원술이었다. 하북을 평정한 원소조차도 그에게 있어서는 '생긴 것만 반반한 서얼'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원가가 가진 대부분의 자원(resource)은 원소가 아닌, 원술에게 지원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됐는가? 지금 시점에서 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의 동네 건달 두목이 대통령까지 오르는 것은 쉽지 않듯이 유비가 게한의 황제까지 오른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어었다.
삼국지의 10가지 교훈 중에 하나는 유비가 온갖 고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그 뜻을 '반쪽이나마' 이룬 것이다. 조조 앞에서 굽신거리고, 필요에 따라 가족까지 버리는 비굴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고난을 대했던 자신의 과거와 태도'를 돌이켜봐야 한다. 적어도 유비는 한결같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힘든 때, 그를 붙잡아준 것은 '광무제 유수'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유비의 인생사를 되짚어보면 그는 일관되게 유수를 닮고자 했으니까.
조조의 호표기병이 대열의 후미를 잡고, 유협 시절부터 함께해 온 그의 부하들이 '그'만은 살려보내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던 때, 다시 말해 생명이 경각에 다다르고 자기혐오가 마음을 짙누르던 그때도 강릉으로 향하던 그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광무제도 이런 고난을 겪으셨겠지..'하는 되뇌임이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에는 등불이 필요한 법이니까.
참고>
야마오카 소하치(山岡 荘八)의 대망(도쿠카와 이에야스)이라는 소설에도 어린 이에야스가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 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일본의 가신문화는 우리나라나 중국과 달라서 어릴 때부터 곁에서 보좌하면서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대신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주군에게 쓴소리도 서습치 않는다. 유혹에 흔들리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유약한 마음을 품고 문제를 회피하고자 할 때, 문제에서 도망치고자 할 때, 이에야스의 '할아버지뻘' 가신들은 어린 이에야스를 호되게 꾸짖는다. 그렇게 해서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정한 승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의 일본인들을 보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소하치의 문체는 나관중과 전혀 다르다. 전개가 느려서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심리 묘사가 매우 섬세하여 마치 그 인물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나는 삼국지 인물들 중에 나관중을 제일 좋아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