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외로움은 내 몫

유학생의 필수 덕목

by Yan

세상사 다 그렇겠지만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싶다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 바로 '나 혼자서 잘 지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마냥 쉽지는 않은 게, 유학을 실제로 와보기 전까지는 내가 정말 혼자서 잘 지낼 줄 아는 사람인지 아는 게 쉽지 않다. 한국에 살 때 혼자 놀기를 잘했던 탓에 나는 내가 혼자서 잘 지내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해외에 나와보니 내 나라에서 내 나라 말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틈에서 혼자 놀기 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혼자 놀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가 모국어 화자만큼 능통하다면 모를까, 일단 기본적으로 한국어만큼 자유자재로, 무의식 중에도 쓸 수 있을 만큼의 언어가 아닌 제2, 제3의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약간의 무게를 늘 짊어지게 한다. 그래서 유학 초반에 정말 스트레스받을 땐 기숙사 1층에 있는 공동 주방에 가지도 않았다. 행여라도 누구 마주쳐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피로했기 때문이다. 100% 알아듣지 못한다는 두려움 내지는 불안감, 그래서 상대가 말하는 것의 뉘앙스나 의미를 모국어만큼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잠재적으로 마음 한편에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준다.


언어에서 시작된 타지 생활의 외로움은 언어가 능통해진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일단 현지 친구들과 내가 공유하는 유년기의 추억이나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친구들과 살면서 받아본 크리스마스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한 친구가 무슨 인형(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다) 시리즈를 받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뭔가 싶었는데 또 다른 미국인 친구가 말해주었다.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인형 시리즈라고. 미국의 역사적 중요한 시기마다 콘셉트로 해서 만들어진 인형인데, 그 인형을 사면 작은 역사책자가 딸려와서, 아이들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역사를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만드는 학습적인 목적의 장난감이라고 했다. 마치 한국인들에게 '뽀로로'나 '둘리'를 얘기하면 촤르르 관련 스토리라인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려나? 여하튼 다 알아듣는데 나만 알아듣지 못했다. 언어가 능통해져도 그런 부분에서 오는 소외감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은 사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는 터라 앞서 말한 것들이 사실 크게 힘들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예전에, 특히 유학 생활 초반에 마음이 지쳤을 때는 저런 것들 하나하나가 상처가 되고 마음을 힘들게 했었다. 뭐 여하튼 그래서 결론은, 타국에서 공부하다 보면 정말로 온전히 '외로워서 죽을 것 같은, 그렇다고 마음에 맞는 외국인 친구나 한국인 친구에게도 온전히 기댈 수 없는' 순간들이 한 번쯤은 오는데, 그럴 때 정말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현타가 온다.


졸업이 가까워진 이제야 나는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며칠 전에도 아침 잘 먹고 혼자서 논문 쓰다가 외로움이 밀려왔었다) 이제는 이것도 밀물처럼 왔다가 다시 썰물처럼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내 감정을 지켜본다. 한때는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사람들을 붙잡고 관심과 사랑을 구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기 합당한 사람임을 알지 못한 채 외부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하니 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많이 깨지고 상처받으면서 깨달았다. 내 외로움은 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대학원 친구 중에 유난히 친구들과 뭘 같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애가 한 명 있다. 밥도 같이 먹고, 공부도 같이 하고, 운동도 같이 하고, 집에도 같이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처럼 외로운 유학생에게는 같이 놀자며 찾아주니 고마운 일이긴 한데, 요즘처럼 나도 졸업을 앞두고 논문 완성에 박차를 가하는 시점에는 사실 마냥 고맙지만은 않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논문 쓰거나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할 때는 혼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고 적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누군가와 같이 작업하면 아무리 조용히 일한다 해도 어쨌거나 상대가 신경 쓰이고 내가 내 시간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 밥 먹고 작업 공간을 옮기면서 되도록 혼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 친구도 나의 그런 점을 모르지는 않아서 내가 뭔가 바쁘게 마감에 쫓겨 일하는 것 같을 때는 연락을 잘 안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며칠 지나서 시간이 맞으면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하는데, 문제는 지난주에 종강을 하면서 그 친구와 같이 어울리던 미국인 친구들이 죄다 자기 집으로 가면서 발생했다. 캠퍼스에 남아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온종일 나만 찾는 것이다. 카페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는 것을 몇 번 '혼자 해야 할 것 같다'라고 거절했더니, 나중에는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 글 쓸 때는 핸드폰도 잘 안 보는 편이라 문자가 안 되는 것 같으니 나중엔 전화가 왔는데, 나도 그 시점에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연구자는 결국 혼자서 작업해야 한다. 내 논문과 내 실험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혼자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면 그 사람은 학계에 남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주 안에 끝내서 교수님께 보내드려야만 연말까지 학술지에 제출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나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건만, 속도 모르고 자꾸 같이 어딜 가서 작업하자고 하니 급기야 나는 내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지 못하고 (거기 있으면 자꾸 와서 노크하고 방해를 한다) 도서관이나 캠퍼스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 숨어서 작업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골칫덩어리 친구 같지만... 평소에는 정말 착하고 상냥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두 팔 다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좋은 친구다. 그런데 그 친구 안에 내재된 외로움,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만 해소되는 그 외로움과 불안감이 증폭될 때면, 곁에 있는 나는 질식할 것 같다. 내가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락이 잘 안 될 때는 '바쁜 일이 있는가 보다'하고 기다리면 되는데, 어떻게든 연락이 닿으려고 한 밤 중에도 전화하거나 연구실에 있는데 불쑥 찾아와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한다(이 질문이 목적이 아니었구나 느껴지는 질문들).


내 외로움은 그 누구의 몫이 아니라 온전히 내 몫이다. 예전에는 결혼해도 외롭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혼자서 잘 지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낸다는 말들도. 그런데 그걸 잘 못하는 내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그 말들이 온전히 이해가 된다. 외로움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엉뚱한 사람들에게 그 외로움을 채우려고 매달리게 된다. 나에게 독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기 쉬운 것도 그런 상황일 때 더 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