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이번 학기 중에 논문 심사를 계획하고 있는 나는 개강과 동시에 마음이 많이 급하다. 논문을 제때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 와중에 구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잡 마켓 사정이야 어느 분야든 안 좋겠지만 학계는 더 심하다. 그래도 한 20-30년 전에는 박사 과정 마치고 포닥(Post Doctor; 박사후연구원) 과정 한 번 하고 나면 교수 임용되는 코스였다고들 하던데 요즘은 포닥을 두세 번 하고 나서도 교수 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앞날을 누가 알 수 있겠냐마는 앞날이 전혀 밝아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논문 쓰는 와중에 불안감과 싸워야 하는 것도 박사 과정생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 중 하나인 것 같다. 결국 어디서 무얼 하든 멘탈 싸움인 것이다.
사실 논문 학기에 다다른 이제는 지난 4년간 유학생활하면서 나름 불안감을 잘 관리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고, 오히려 이제 박사 과정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니 조금 외롭고 지치더라도 '이제 조금만 더해서 끝내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름 최근에 좋은 멘탈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번 주 자잘하지만 내 불안감을 돋구는 일이 있어서 기분이 울적해진 김에 오랜만에 브런치 글을 쓴다.
우선 첫 번째는 지난해 연말에 지원했던 구직 상황이 둘 다 실패한 것 같아서다. 두 군데 지원을 했는데 한 군데는 떨어졌고 나머지 한 군데도 오늘 보아하니 떨어진 것 같다. 생전 처음 써보는 지원서라 첫 번째 지원한 곳은 무려 3주 동안 수십 번을 고치면서 썼고, 두 번째 것도 조금 짧아지긴 했지만 꼬박 일주일이 걸려 완성했다. 그래서 사실 11월부터는 논문은 손도 대지 못했다. 지원서 작성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쓰면서도 '지금 내가 논문 써야 하는데 지원서만 작성하고 있으니 이게 맞는 건가' 싶긴 했는데, 어차피 논문이라는 것도 무사히 졸업해서 '취직'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대학원생들이 바라는 목적이니 지금 이렇게 투자하는 게 나중에 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스스로를 달래며 썼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과 교수님들, 주위 구직 중이거나 이미 취직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졸업하자마자 교수가 되는 것은 요즘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이고 미국에서도 쉽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니까. 아는 분은 무려 100번을 넘게 써서 지금의 교수직을 얻었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그 얘길 듣고 크게 감명받은 내가 이 얘기를 꺼내며 교수님께 '저도 99번 실패할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겠어요!' 외쳤더니 그 말을 들은 교수님이 '걔가 100번 지원하는 동안 그 지도교수는 얼마나 많은 추천서를 써줬겠니...'라고 하시길래 아... 또 그 생각은 못했네... 하며 민망했던 기억.)
첫 번째 현타는 지원한 곳 중 한 군데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서였다. 지원 요건 중 박사 학위는 '우대사항'이고 석사 학위만 있어도 된다길래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지만 진짜 공들여서 지원서 작성해 제출했는데(나 너무 열심히 서류 작성하는 거 아냐?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탈락했다. 합격하면 당장 3월부터 근무해야 한다고 해서 혹시라도 붙으면 2월 중에 심사 마치고 여길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모든 건 결국 나 혼자서 김칫국 마신 셈이 되었다. 이게 첫 번째 현타 모먼트였다.
두 번째 현타 모먼트는 바로 오늘이었다. 제일 먼저 첫 번째로 지원서를 넣었던 곳에서 한 달이 넘게 연락이 오지 않아서 '아마 떨어진 모양'이라고 내심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그 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후보에 올랐는지는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미 20년 가까이 교수직에 계셨던 분 같았다. 심지어 내 논문에 인용까지 한 분이었다. 와 저런 분이 나와 경쟁을 하다니 이건 내가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구나! 내 주제도 모르고 여기다 지원서를 냈네.... 갑자기 자괴감이 들면서 너무 우울해졌다. 경력자들이 다 자리를 차지하면 나 같은 신입들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요! 어디선가 들었던 대사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는 나와 가까운 유학생 한 명이 미국 유명 대학교(미국 잘 모르는 한국인들도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대학교들)에서 최근에 난 교수 채용 공고문을 내게 전달해 줬는데, 처음에 학교 이름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아니 세상에 이 사람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감히 내가 저런 곳에 어떻게 지원을? 싶은 생각이 드는 곳들만 보내줬는데, 그곳에 지원한다고 하면 우리 지도 교수님이 비웃으실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앞서 지원한 곳 중 한 곳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 이후로 과연 이 한 몸 누일 학교가 있을까 싶어서 많이 낙심해 있던 차라 그런지, 그 학생이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한국은 강사법이 통과되면서 이제 무조건 교수 채용 시 공개채용을 해야 하고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채용하는 것이 공식적으로는 불가라고 하지만, 막상 실상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미리 채용할 사람을 내정해 두고 당사자에게도 미리 연락을 해둔 다음에 겉보기에는 공고문을 내서 모든 절차대로 진행한 후 내정자로 선택해서 채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인맥이 없으면 교수도 할 수 없는 세상이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게다가 한국은 논문 물량으로 요새 점수를 다 매기다 보니 무조건 양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시대라, 각 학교마다 학과마다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미국 대학교가 오히려 박사 학위를 갓 따고 잡마켓에 뛰어드는 이들에게는 유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전은 해볼 수 있는 시장 같다. 그렇지만 또 나처럼 미국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들에게는 그 역시 그림의 떡이겠지만....
나는 이제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4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사실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 그런데 또 현실적으로 한국에서는 바로 구직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미국에서 포닥 자리라도 알아보아야 하나 싶은데, 포닥 자리도 쉬운 것 아니지만 설령 구한다 하더라도 또 최소 1-2년을 미국에서 지내야 하는 게 사실 엄두가 안 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현타는... 일전에 브런치에 남기기도 했던 불안도가 높고 집착이 강한 그 친구 때문이다. 학과는 물론이고 캠퍼스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당발인 데다가 야무지고 똑똑한 이 친구는 다 좋은데 남에게 의존적인 면이 좀 강하다. 뭘 하든 같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탓에 공부도 운동도 식사도 다 친구들과 같이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게 아무래도 최근에 학과 내 친구들이 하나둘씩 졸업하며 취직하면서 떠나서 이 친구가 외로움을 느끼면서, 그 친구 안에 내재된 불안도가 확 높아진 것 같다. 특히 내가 이번에 겨울방학 때 앞서 지원했던 그 탈락한 곳 면접 일정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한국 방문을 겨울 방학 중 해야 했는데, 내가 겨울방학 때 미국에 있을 예정이었던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이 친구에게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혹시라도 그곳에 최종적으로 붙으면 나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미국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친구에게 불안을 야기한 것 같다.
내 합격 여부가 얼마나 궁금했는지 무려 국제전화를 걸어서 내게 소식을 물어봤는데, 대놓고 물어보긴 그랬던지 자기 논문 때문에 나에게 상의할 게 있다는 핑계로 전화를 걸었다. 네 졸업 논문을 나한테??? 난 그 분야 전문가도 아니고, 네 지도교수가 있는데 굳이 나에게? 그것도 국제전화로? 이메일도 아니고? 의아해서 일단 전화를 받고 통화를 했는데 마지막에 슬그머니 내 서류전형 여부를 물어보길래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네가 전화한 건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였구나.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지... 나는 이렇게 머리 굴려서 아닌 척하면서 목적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물론 내가 떠나면 정든 친구가 또 한 명 떠나는 것이니 그게 싫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내 불합격 소식을 듣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화가 나고 불쾌했다. 다시는 어디 지원하거나 서류 전형 붙더라도 얘한테는 절대 공유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이 친구와 같이 공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남에게 관심이 많아도 너무 많고, 도대체가 혼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꼭 누군가를 옆에 앉혀놓고 같이 공부해야만 하는 그 의존성이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 논문 쓰는 건 너무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라 나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데, 누군가 내가 더 챙겨줘야 한다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불행에 은근히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정이 뚝 떨어져서, 이 아이는 이 질투심과 경쟁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많은 사람을 잃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연이은 불합격 통보와 질투심 많은 친구까지, 논문만으로도 버거운 내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여, 제발 무탈히 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