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학원생의 마음가짐

by Yan

어제의 초우울한 일기를 뒤로 하고 오늘도 여전히 해는 뜨고, 이곳 날씨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너무 화창하다. 어제 밤늦게까지 논문을 붙잡고 있다가, 자꾸만 떠오르는 자기 객관화('아 내 주제도 모르고 너무 센 곳에 지원했구나') 및 자기 비난('그러게 좀 더 열심히 연구해서 저널 출간도 많이 하고 그랬어야지! 왜 그렇게 잘 거 다 자고 먹을 거 다 먹으면서 박사 했어!)으로 인해 결국 당초 잠들려던 시간보다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스트레스 받으면 일단 잔다).


친구 추천을 받아 세일할 때 사두었던 멜라토닌 젤리를 두 알 먹고 마그네슘까지 먹고 자서 그런가 근심걱정으로 휩싸인 사람 답지 않게 8시간을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는데, 이깟 논문 써봤자 취직도 못할 텐데 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어 극 우울해지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결국 두 시간을 가만히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을 거면 차라리 나가서 걷기라도 하다 오자 싶어 벌떡 일어났다(물론 결심에서부터 행동에 옮기기까지 또 한 세월 걸리긴 했다).


막상 일어났더니 허기가 져서 어제 마트 갔다가 세일하길래 사두었던 소고기를 구워 늦은 아침(이라고 쓰고 점심이라고 읽는다)을 먹고 곧바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 속상한데 주위에 이런 속상한 마음 나눌 친구도 없고 생각나는 건 가족뿐이어서, 시계를 보니 한국은 이제 오전 7시쯤 될 것 같아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날씨는 내 속도 모르고 너무 좋아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 부모님에게 이런 하소연해봤자 부모님 역시 속상하실 텐데, 그걸 잘 알면서도 결국 가장 힘들 때는 가족에게 의지하게 된다. 한참 통화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치한 자그마한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사 마시고 나니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이 논문 다 쓰고 졸업한 다음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일단 나는 지금 주어진 것을 하자. 이 논문을 잘 마무리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여길 떠나는 것, 거기에만 내 모든 힘을 쏟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논문이라 해도, 연구라 해도.... 그냥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었으니까 이걸 잘 매듭짓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데 마트가 보였다. 무슨 마음인지 갑자기 꽃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마트에 들어가 그 안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꽃을 고르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한 다발 사고, 생각해 보니 건전지도 사야 하는 게 생각나서 다른 마트에 들렀다. 건전지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줄 서 있는 동안 지갑을 꺼낸다고 하는 게 실수로 가방 안에 있던 아이팟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아이팟이 떨어지는 순간 그 안에 들어있던 이어폰 두 개가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으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충동적으로 산 꽃다발


계산원이 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데 민망한 건 잠시일 뿐 일단 사라진 이어폰 두 개의 행방이 중요했다. 하나는 다행히 바로 앞에 보여서 주웠는데 나머지 하나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산대 밑으로 들어갔다면 꺼내기 쉽지 않을 텐데 걱정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 줄 서 있던 키 크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서는 괜찮냐고 물으셨다. 괜찮을리가요....


몇 분의 짧은 소동을 끝으로 나머지 이어폰도 무사히 찾았는데, 그 할아버지의 도움은 1도 받지 않았지만 내가 이어폰 찾는 내내 옆에서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와주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타지 생활 중에 때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넨 사소한 친절에 큰 위로를 받을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제 내 불합격 소식에 은근히 좋아하는 듯한 동료의 모습에 인류애를 잃었었는데, 할아버지가 노심초사하시며 내 이어폰을 찾아주려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니 찡했다. 그래서 이어폰을 찾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할아버지께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연신 외쳤다. 내 이어폰을 찾아준 것에 대한 게 아니라(내가 다 찾았으므로! ㅋ) 지금 이 순간 이 머나먼 나라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는 내게 흔쾌히 따뜻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를 건네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 먹고 씻어 두었던 파스타 소스 통에 꽃을 담고, 책상에 앉아 논문 작업을 하는 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미래, 타인의 생각, 질투하는 사람들의 방해공작 같은 것들은 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최선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그건 바로 내 논문이겠지! 지금도 이 지구 어딘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든 유학생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유종의 미라는 축복이 찾아오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