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도 내가 아니다

상대의 신발 속에 내 발 넣어보기

by Yan

미국 숙어 중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상대의 신발 속에 내 발을 넣어본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비유로 이보다 찰떡인 비유가 또 있을까 싶어 무릎을 치곤 한다. 내가 신을 것인데도 내 맘대로 사기 쉽지 않은 게 신발, 바지 같은 것들이다. 뻔히 내 사이즈 잘 알고 내 발 모양도 잘 알지만, 막상 신발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면 생각과는 다를 때가 상당히 많다. 내가 신을 신발조차 곧잘 실패하는 우리이니, 남의 신발은 오죽하랴. 게다가 신발은 그 주인의 걷는 습관, 걸음걸이에 맞게 변형이 일어나기 마련이니 새 신발이 아닌 남이 신던 신발에 내 발을 넣는 행위 자체가 이미 엄청난 고난도의 일인 것이다.


어릴 적에는 생각이나 가치관들이 아직 굳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을 미처 인식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왜 가끔 친구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성인이 되고 보니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가 많다는 것, 생각보다 상당수의 갈등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최소 20년에서 30~40년간 자신만의 가치관, 좁게는 나 하나, 넓게는 내 가족, 그보다 넓게 본다면 내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렇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혹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과 맞닥뜨릴 때, 그 차이를 '틀림'으로 보지 않고 '다름'으로 인식하는 게 정말 중요하고, 또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매순간 느낀다.


오늘도 그런 걸 느낀 날이었다.


오후에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인이 여행을 가서 사진을 올린 걸 봤는데 동물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체험학습? 같은 걸 한 모양이었다. 야생동물들과 함께 붙어서 사진을 찍고 만져보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인데 야생동물을 만지는 것 자체가 그 동물의 야생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동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동물애호가인 내 친구는 크게 분노해서, 그렇지만 그 사진을 올린 지인과 가까운 사이라 차마 그 사람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며 어찌 이럴 수 있나 싶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맨 처음에 그 사진을 봤을 땐 그 사진 속 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게 이 정도로 화가 날 일인가?' 싶었다. 뉴스에서 가끔 인재 사고, 천재지변 뉴스만 나와도 몇 날 며칠을 마음 아파하며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공감 게이지 만랩인 내가, 야생동물을 안고 찍은 그 사진을 봤을 때는 그 정도의 경각심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살면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전무하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본다거나 할 정도의 열정은 없다.


친구의 분노 포인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이게 좋은 행동이 아니구나 깨닫고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당연히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고 분노의 문자를 보냈는데 뭔가 공감하는 흉내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사진이 좀 불편하게 느껴질 만하다'는 취지로 답했는데 답하고 나서 문득 생각해 보니 '혹시 나도 예전에 이 친구가 봤을 때 이렇게 동물과 관련해서 개념 없는 언행을 한 적 없나' 갑자기 뜻밖의 자기 검열의 시간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문득 2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 수강생 중 하나가 버릇없이 굴어서 진땀을 뺐던 기억 말이다. 교수는 아니어도 나름 강사인 내게 Hey bro~ 하며 부르지 않나, 이메일에 Hello나 Hi 같은 인사도 없이 무슨 문자 보내듯 제 할 말만 띡 한 줄 써서 보내는 싸가지 하며, 수업시간엔 매일 딴짓하고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시험 결과나 과제 평가가 안 좋으면 폭언을 하면서 이메일을 보냈던 애였다. '네가 ppt가 아니라 pdf로 자료를 올려주는 바람에 맥 유저인 내가 파일을 읽을 수 없어서, 성적이 이따구로 나왔다, 너는 내가 지금껏 대학교에서 만난 강사 중 최악의 선생이다' 등등... 녀석의 폭언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고 결국 지도교수님과 학과장 교수님한테까지 올라가서 학과 교수진 회의에서까지 말이 나왔던 그 녀석. 강의평가 늘 학과 내 1위인 데다가 애들 가르치는 낙으로 대학원 생활하던 내게 그 당시 학기는 정말 괴롭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여하튼 그 학생은 결국 학과 내에서 어찌 조치해야 할지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다가 조치가 차일피일 미뤄졌고 (주립대 강의에서 학생을 쫓아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조건과 지침을 필요로 했다) 결국 내가 참고 견디는 쪽으로 결정이 이뤄졌는데, 그 조치에 크게 반발한 내가 이틀 정도 지도교수님에게서 잠수를 타기도 했었다.


내심 '이제 학과 회의까지 올라갔고 상황에 따라 총장한테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까 이제 이 녀석은 크게 혼나고 방출되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냥 웬만하면 네가 참는 쪽으로 하자'는 교수님의 메일이 오자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그때는 다 뒤집어엎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여하튼 격분한 내가 잠수 타기 전 교수님께 마지막으로 보냈던 메일은 '학생들은 자기 맘에 안 드는 교수에게 이런저런 이의 제기하면서 학교에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데, 왜 교사들은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이 학생이 저를 지금 괴롭히고 있는데, 왜 제가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


그 메일을 끝으로 평소 순둥순둥했던 내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자 놀란 교수님이 학과장 교수님께 SOS 메일을 취하고, 나는 이틀 정도 화를 고른 다음 결국 교수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던 내게 교수님이 해준 말씀이 있었다.


"교수님, 저도 화 낼 줄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내 기분 상했다고 그 애처럼 아무에게나 함부로 화내고 폭언을 하지는 않아요. 제가 화를 내지 않는 건 상대를 인간으로 존중하기 때문이에요. 내 기분 나쁘다고 상대에게 폭언을 쏟아붓는 것이 폭력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 네 말이 옳아. 그리고 내 생각에 너는 그런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타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법을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것 같구나. 그렇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훌륭한 가정에서 자라는 건 아니야. 부모나 형제가 그런 것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차마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는--내 생각에 아마 그 아이는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 같아-- 너처럼 사고하지 못할 수도 있단다. 그 아이는 상대를 온화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법을 지금껏 성장하면서 배우지 못한 거야."


그 당시에는 그 대화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야생동물 이야기를 하며 분노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려니 그 대화를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이제야 나는 제대로 교수님의 뜻을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때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로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늠하는 표현들을 쓰곤 한다(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표현을 정말 싫어한다. 물질만능주의인 한국인들의 정서를 정말 토 나올 정도로 노골적으로 빗댄 표현이 아닐까 싶어서다. 금수저는 뭐 그러려니 하는데... 못 사는 사람을 상대로 '흙'에 빗대는 것이 너무 수준 이하다. 누가 처음 만든 표현인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저급한 단어 중 하나), 그 유산이 비단 물질적인 것만 포함하는 게 아닌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 중 생각보다 정말 많은 것들이 우리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일단 뭐 외모, 경제력, 지능, 이런 건 당연히 부모에게서 오는 것이 맞고, 앞서 내 친구와 같이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복지에 대한 민감성, 이런 것도 결국 가정환경에서 많이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나처럼 생전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내 친구만큼 동물복지에 대해 사실 그다지 생각도 없고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민감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것에 대해 조금 떨어지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하고 분노하기 이전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멸하거나 비아냥거리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앞서 무례한 학생에 대해 분노했던 나 또한 늘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우리 부모님에게서 그런 가치관과 정서를 물려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가도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늘 강조했던 부모님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배운 인간의 도리, 예의, 이런 것들도, 우리 교수님이 지적한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배울 수 없는 가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예의범절에 있어서는 '금수저'였던 셈이다.


직접 본 건 아닌데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아래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들이 3루타를 친 줄 압니다. 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자랑스러워하는 꼴은... 보기 민망하죠."


처음에 그 대사를 들었을 땐 드라마 속에서처럼 어떤 특정한 자질, 소질, 재능, 내지는 물질, 경제력에 대한 대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친구와 대화하면서 생각해 보니 저 대사는 결국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내 부모, 가정, 친구들에게서 물려받거나 영향받은 것들)을 관통하는 대사 같다.


내가 남들보다 동물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면? 내가 남들보다 유난히 그런 감성적인 면이 발달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남들보다 좀 더 자주, 그리고 더 어린 시절에 동물을 자주 접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남들보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고 눈치가 좋아서 센스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면? 그 또한 내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감각을 터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걸 반대로 접목시키면 어떨까? 반대로 동물에 대해 무지하거나 동물복지에 대해 이해도가 낮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동물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주위에 없어서,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할 상황 자체를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눈치가 없고 센스가 없는 사람 또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자라난 것일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 좋은 자질과 능력들이 나만의 노력과 힘으로 이뤄낸 성과가 아니듯, 누군가의 결핍 또한 꼭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도 원치 않았고, 아니 어쩌면 그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던 환경에서 나고 자란 것일 수도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매일의 삶 속에서 이걸 조우할 때면 생각만큼 너그럽지 못한 내 모습을 왕왕 본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도 그랬지만 유학을 온 이후에 좀 더 건강을 챙기면서 (아무래도 병원 한 번 가면 돈이 왕창 깨지다 보니) 요즘은 정말 먹는 것에 많이 신경을 쓰는데, 어제는 우연히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런 내 모습이 그 친구 눈에 좀 유난스럽게 보였을까 싶어 집에 와서 내심 신경이 쓰였다.


나는 샐러드에 드레싱도 가급적 뿌리지 않고, 찌개나 국을 끓일 때도 레시피의 절반 내지는 2/3 정도만 간을 한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맵찔이라서이기도 하지만, 너무 짜거나 매운 게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안 이후부터는 간을 약하게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렇게 오래 먹어와서 그런지 외식을 하거나 그래도 가끔 자극적인 게 먹고 싶어서 먹은 날엔 졸음이 쏟아지거나 속이 부글거린다. 재료도 웬만하면 유기농 마트에 가서 사고, 고기도 가공된 소시지나 햄 대신 붉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하얀 닭고기 등으로 사다 먹는다. 그러다 보니 유학생 치고는 요리나 장 보는 것에 쏟는 시간도 많은데, 밥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고 듣던 내 친구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는 게 중요하고 좋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 유학생이 바쁘다 보니 요리하고 장 보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사다 먹는 게 나은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금 논문 쓰면서 바쁘게 살아야 할 대학원생이 요리에 공 들이며 살다니, 내가 정신 못 차린 대학원생 같아 보였으려나 싶어서 뻘쭘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친구가 정말 마음 속으로 '논문 써야 할 사람이 엉뚱한 데 시간 쏟고 있네'라고 날 한심하게 봤는지는 그 친구에게 묻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다. 내가 별 생각 없이 내 식습관이나 밥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그 친구도 별 생각 없이 대꾸한 걸 수도 있다. 그리고 설령 그 친구가 날 한심하게 봤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타인의 생각은 그 사람 것이고 내 생각은 내 것이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니듯,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그건 그 사람 자유이고, 나는 그 판단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내 행동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이상.


친구가 동물원에 가서 체험학습을 하든, 논문 쓰는 박사 과정생이 유기농 마트 가서 한 시간 동안 장 보고 집에 와서 한 시간 동안 요리를 하든, 그냥 다 각자의 생각대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게 나에게 혹은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게 아닌 이상. '아 너는 그렇구나'에서 끝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늘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 판단 judging을 하기 시작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친구가 날 jugding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나 또한 남을 judging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내일 되면 나도 모르는 새 내 가치관으로 남을 곧잘 재단하겠지만.... 인생은 나이 먹어도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매일이 수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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