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안에 졸업하려던 내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겼다. 첫 번째 챕터에 들어가는 실험을 보신 지도교수님이 다시 실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실험을 다시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아니다, 큰 문제인가?), 기왕이면 좀 더 일찍 말씀 주시지, 이 실험 맨 처음 보셨던 게 2년 전인데 왜 지난 2년 간 별말씀 없으시다가 이제야 말씀 주시는 건지.... (아마 논문 거의 다 완성해서 완성형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니 영 아니다 싶으셨던 건지), 여하튼 한창 논문 작성하던 중에 부랴부랴 다시 수정해서 계획에도 없던 실험을 하게 되었다.
어쩐지 세상엔 쉬운 일이 없는데.... 논문이 생각보다 너무 술술 잘 써져서, '와, 왜 사람들은 논문 쓰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들 하는 거지? 나 이쪽으로 재능 있나 봐!'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논알못의 비루한 생각이었고.... 이래서 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에 박사 과정생들이 졸업을 차일피일 미루고, 졸업 언제냐고 물으면 말을 흐리는구나 깨달았다.
처음엔 자칫 졸업이 늦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에 밤에 잠도 못 잤는데(그래봤자 겨우 이틀 동안이긴 하지만... 평소 머리 대면 바로 잠드는 나로서는 엄청난 사건), 이후 실험을 수정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박사 과정 시작한 이후 내가 처음으로 자력으로 만들고 진행한 실험이라 안 그래도 오류가 많았던 차, 이번 기회에 오류를 수정할 기회가 되어 오히려 잘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논문의 핵심이 그 뒷부분에 나오는 다른 실험이라, 첫 번째 챕터에 등장하는 이 실험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교수님 생각은 반대였다.
"네 논문 읽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접하는 게 이 실험일 텐데, 여기서 네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면 그다음 장은 읽지도 않고 덮을 거야. 그러니 네 논문의 포문을 여는 이 실험이 정말 중요해."
사실 논문 쓰기 전부터 오류가 있는 실험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걸 언제 또다시 하나 싶기도 하고(번아웃이 올 것 같아 나는 그냥 얼른 논문을 끝내버리고만 싶었다), 어차피 이게 핵심도 아니고 이 뒤에 실험 더 나오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교수님 판단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 논문은 내 평생 남는 기록인데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으니 다행이고, 혹시 이전 실험보다 수정된 실험의 결과가 더 잘 나오면 최근엔 논문에만 집중하느라 새로 한 연구가 없어서 올해 학회에 나갈 연구소재도 없었는데 이걸로 학회에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좋아! 인생은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행히도 몇 년 새 경험이 조금 쌓였다고, 맨 처음에는 몇 달이 걸렸던 것을 이번에는 1주일 만에 싹 다 뜯어고쳐서 며칠 전부터 실험을 돌리기 시작했다. 온라인 실험이라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속 링크를 보내면 각자 편한 시간에 접속해서 완료하는 형식이고, 참가 사례로는 아무래도 내가 미국에 있다 보니 온라인으로도 전송 가능한 기프티콘으로 지급한다. 처음에 내가 가까운 지인들 몇 명에게 시범으로 시켜보고 얼마나 걸렸냐 물어보니 15-20분 걸렸다길래, 처음에는 참가자 모집 공고문에 '예상 소요시간 30분'이라 기재해 놓고 참가 사례도 1만 원으로 정했다('최대' 예상 소요시간으로 적어놓는 까닭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도 있지만 공고문에 적힌 시간보다 걸리면 그것 갖고 컴플레인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맨 첫 참가자(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실험을 참여하고 나더니 40분 정도 걸렸는데 실험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사람에 따라 1시간도 걸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즉시 공고문을 '45분-1시간 소요'로 바꾸고, 참가 사례도 당초 1만 원이었던 금액에서 2만 원으로 늘렸다 (시급 1만 원 시대에 최저시급보다는 많이 줘야 피험자 모집이 수월하다).
화들짝 놀라서 부리나케 공고문을 바꾼 것은 사실 지금까지 피험자 모집을 하면서 겪었던 안 좋은 일들과 연관이 있다. 언젠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내게는 연구와 관련된 일들이 전자이고, 바로 이번처럼 실험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사례비를 지급하는 행정적인 일이 후자에 해당한다.
일단 참가자 모집은 마치 영업사원이 된 것 마냥 주위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까 싫다. 물론 공짜로 사람들 동원하는 것 아니니까 너무 미안해할 이유 없긴 한데, 그래도 입장 바꿔 생각하면 30분-1시간 들여서 참여하고 6-7천 원에서 1-2만 원 받는 것이니 엄청나게 큰 금액도 아니다. 직장인들처럼 월급 받는 사람들은 일단 퇴근 후에 시간을 내서 참여해야 하니 귀찮고, 까짓 몇 천 원 그냥 자기 돈으로 커피 사 마시면 되는 돈이니까, 결국 실험을 하는 학자들의 주 타깃은 대개 대학생들이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참가 사례비 지급하는 게 돈이 엮여 있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라도 발생했다가는 곧바로 컴플레인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맨 처음 실험을 할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기프티콘을 전송하면 다 끝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가끔 시스템의 오류 때문인지 난 분명 보냈는데 상대방은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통신사에 스팸 차단 서비스를 신청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고, 혹은 전송한 사이트(내가 직접 보낼 때도 있지만 대량으로 전송해야 할 때는 웹사이트를 통해 구매해서 보낸다)의 오류로 그런 경우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수신인이 본인 설정을 바꾸면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이트에 문의하면 그쪽에서 다시 재전송을 해서 해결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 해결은 되었다.
그런데 그 해결이 되기 전까지 기프티콘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화를 낸다. 이들에게 실수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바로 사기꾼이 되어서 온갖 욕을 먹는다. 나중에야 시스템 오류로 제대로 수신되지 않은 것을 알고 나서는 요새는 기프티콘을 발송하면 무조건 이메일로 기프티콘 발송이 됐으니 못 받았다면 내게 꼭 연락 달라고 추후 안내를 한다. 혹시라도 누락됐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실험 참가자 모집만 하고 입을 싹 씻는 사람처럼 보이긴 싫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도 간밤에 실험에 참여한 6명의 사람들에게 기프티콘 전송을 하는 일을 무려 2시간에 걸려서 처리했다. 이미 기프티콘 발송한 사람들과 겹치지 않게 하나하나 이메일과 휴대전화 번호를 대조하면서 5번 넘게 검토를 했다. 덜렁대는 성격인지라 예전에는 같은 사람에게 두 번 보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험을 마치고 나면 내가 보기 좋게 데이터가 싹 정리돼서 뜨는 게 아니라 내가 일일이 접속해서 개개인의 접속 기록과 실험 완료 여부를 대조해 확인해야 한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숫자와 관련된 행정적인 일에 약하기 때문에 훨씬 더 집중해서 하지 않으면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발생한다. 분명 기프티콘 발송하고 나서 무사히 발송된 것 확인까지 했는데, 오후에 내 부탁으로 공고문을 올려줬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공고문을 올린 글에 누군가 댓글로 '이거 약속한 2만 원으로 주지 않고 8천 원짜리만 보내주는데 제대로 명시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남겼다는 것이다. 내가 기프티콘을 다량으로 구매해서 전송할 때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는데 그곳을 검색해 보니 2만 원짜리 기프티콘이 없어서 (최대 16,00원짜리 밖에 없었다), 14,000원짜리와 8,000원짜리로 구성해서 한 사람 당 두 개씩 보낸 게 화근이었다. 항의한 사람은 아마 그중 8천 원짜리만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둘 다 받았는데 나중에 온 문자만 보았거나? 당사자가 아직 내게 연락이 없으므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분명히 내가 기프티콘 보낸 다음에 일일이 참가자들에게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연락 달라'고 했건만, 이메일로 연락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공고문에 댓글로, 그것도 내게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채 그런 댓글을 남겼다니, 정말 크게 속이 상했다. 내 이름과 학교, 학과 이름, 연락처를 다 공개하고 진행하는 실험인데 설마 약속한 금액대로 지급을 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러면 사기꾼인데? 아 뭔가 잘못돼서 올 게 안 왔나 보다, 일단 이 사람한테 사실 확인을 하자,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쩐지 오늘 오후에 어떤 사람이 이메일로 '아직 실험 참여 안했는데 이거 2만원 주는 거 맞냐'고 확인하길래 맞다고 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댓글을 읽고 나서 미심쩍어서 내게 확인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졸업 논문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저런 댓글이 올라왔다는 얘기를 들으니 좀 오버 같긴 한데 마음이 무너져 내리듯 너무 속상하다. 울고 싶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논문 하나 완성하자고 홀로 외로이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기꾼으로 오해 받은 기분이다. 내가 참가자 모집하느라 고생하는 걸 알고 있던 친구도 괜히 내 부탁으로 그 사이트에 공고문 올려줬다가 얼결에 안 좋은 경험만 하고 미안하기 그지 없다. 안내 메일 받은 사람들 중 몇 명은 '기프티콘 잘 받았다'며 실험 잘 됐으면 좋겠다고, 원하시는 결과 나왔으면 좋겠다고 덕담까지 줬던 걸 보면 아마 그 사람 한 명에게만 에러가 발생한 것 같은데(불행 중 다행인가), 그 사람 한 명이긴 하지만 2만원 준다고 하고 8천원 짜리 준 사기꾼으로 오인 받은 게 속상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즉시 이미 기프티콘 전송한 참가자들 전원을 대상으로 '두 개의 기프티콘을 보내드렸는데 그중 하나만 받으셨거나 다 못 받으셨다면 노여워 마시고(나의 분노 포인트를 여기에 아주 소심하게 표현함) 꼭 내게 연락 달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으시게 조치해 드리겠다'라고 다시 안내 메일을 발송했다. 아직 답장은 안와서 해결은 안됐는데, 그래서 그런가 서럽고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집중도 안된다.
타인의 실수에 조금은 너그러운 사회였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아도 모두가 정말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이 실험을 하기까지 일주일 내내 밤을 밥 먹듯이 새면서 고생했다. 내 논문을 위해서 한 고생이니 누군가에게 좋은 소리 들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런 소리 들으면 정말 찬물 끼얹은 것처럼 확 의욕이 사그라든다. 물론 그 사람 입장도 이해는 된다. 2만 원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8천 원짜리 기프티콘 하나 딸랑 오면 당연히 기분 안 좋겠지. 그 사람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기프티콘을 보내는지 전후 사정을 모르니, 내가 고심 끝에 서로 다른 금액대의 기프티콘 두 개로 구성해서 도합 2만 원짜리를 보낼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 못했을 것이다. 약속대로 못 받았으니 화난 것 이해는 하는데, 왜 거기서 바로 분노해서 그걸 굳이 그 공개적인 공간에서 '이 사람 약속대로 하지 않으니 주의하라'라고 비난을 했어야만 했는지.... 화가 났을 때 즉각 화를 내기보다는, 아, 이 사람 이거 실수했구나, 잘못 보냈는지 일단 확인해 보자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까? 나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수 있는데, 내가 지금 논문 때문에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어서 그런가, 정말 너무 속상다. 누군가가 잘못한 걸 봤을 때 그게 그 사람의 의도치 않은 '실수'일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는 건, 그 사람의 기본 전제가 '이 세상에는 사기꾼이 많다'는 생각이라는 방증일까?
오늘의 일을 겪으며 혹시 나도 예전에 이런 식으로 타인의 실수에 쉽게 분노하고 비난의 화살을 겨눈 적은 없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내가 좀 담대하고 강심장이고 마이웨이여서, 이런 일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