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생각은 타인의 것이다

by Yan

다른 유학생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의 경우 유학을 와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나 스스로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고 나를 어떻게 관리하면 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 유학 생활의 유익 중 하나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유학생활 초반엔 뭔가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 왜 그런지조차 잘 몰랐다. 학교에서 카운슬링 서비스도 받아 보고 (한국에 비해 미국은 조금만 힘들어도 카운슬링받으라고 사람들이 편히 제안하고 본인이 카운슬링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오픈하는 분위기다), 또 나름 혼자서 심리학 관련 유튜브 채널이나 책도 읽고 공부하면서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이해할 수 없었던 언행,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예전 같았으면 이상하다고 하고 넘겼을 일들을,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나아가 사람 자체에 대해 이해가 깊어지면서 조금은 더 너그러워졌다.


요새 논문 쓴다고 개강한 이래 계속 혼자서 작업하면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줄였는데, 외향적인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사실 함께 자주 공부했던 친구 중 하나가 내가 거슬리는 행동을 가끔 하기 때문이다. 이게 내가 기분 좋고 컨디션 괜찮을 때는 '에구, 또 저러네' 하고 그냥 넘어가는데, 요새는 나도 논문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정신적으로 버거워서 그런지 그런 그 친구의 행동을 견디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 '논문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 다녔다.


그러다가 최근에 좀 심하게 번아웃이 오면서 아 역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구나 싶어 그 친구와 오늘 정말 정말 오랜만에 카페에서 공부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친구의 언행을 접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오늘의 일기를 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고 그 친구는 장점이 많은 친구다. 문제는 단점이, 내가 좀 견디기 힘들어하는 단점이라는 점인데, 바로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나만의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지만 그 친구의 문제는 그걸 입 밖에 내고,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고, 나아가 그걸 함께 있는 내가 동참하길 바란다는 데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넌씨눈' 모드를 장착한 다음 짐짓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어물쩍 넘기고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 눈치껏 적당히 다른 주제로 대화를 전환시켜서 험담의 장(?)을 없애곤 한다.


가끔 좀 심하게 남 험담을 할 때는 듣기 싫어서 그만 좀 하라고 한마디 할까 하다가도, 이 친구가 또 무서운 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해코지할 때가 있기 때문에, 괜히 한소리 했다가 나에게도 그 화살이 돌아올까 싶어서 그냥 모르는 척, 못 알아들은 척, 하며 잠자코 지내온 나다.


오늘도 카페에서 만나자마자 우리 과 학생 한 명을 언급하면서 "걘 정말 미스터리야"라고 말하며 험담을 시작할 시동을 드릉드릉 걸길래, 못 알아들은 척 '그렇구나~' 하고 적당히 대꾸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입이 간지러웠는지 또 험담을 시작했다. 그 학생이 친한 친구가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게 이유였다. 나도 그 학생과 아주 가까운 건 아니지만 친한 친구가 없으면 어때서? 그리고 걔가 누구랑 친한지 우리가 알게 뭐람? 우리가 모르지만 알고 보니 아주 친한 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걔가 친구가 한 명이건 백 명이건 그게 험담의 대상이 될 이유가 되나? 그래서 별로 친한 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연스럽게 그 학생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


"지난 학기에 여기 떠난 A가 송별파티할 때 걔를 초대했었어. 그러니 A랑 친한 것 아닐까?"

"너 걔가 진짜 A랑 친하다고 생각해? 난 아닌 것 같아."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비 거는 것 같아 참았다) 아 그래? ....나 저번에 카페 갔다가 걔가 B랑 같이 공부하는 거 봤어. B랑도 친한 것 같던데!"

"B는 최근에 새로 사귄 친구잖아."

".....아 그래... (새로 사귄 친구는 친구가 아니야?)"


갑자기 불쾌해졌다. 자기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를 타인에게도 적용해서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걔가 친구가 누구이건 몇 명이건 내게 피해 주는 게 없다면 비난할 이유가 없다. 아 그냥 혼자서 공부할걸... 수도승 모드로 살다가 너무 외로워서 오래간만에 카페 나와서 같이 공부하자는 제안에 응했더니 이런 스트레스가... 속으로 후회감이 밀려왔다. 적당히 30분 정도만 더 앉아있다가 핑계 대면서 집에 가서 나 혼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 보니 이따금 내가 이 친구의 언행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까닭은 이 친구가 자꾸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나아가 그 판단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 상대의 언행을 통제하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는 그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비해 얼핏 봐서는 그리 거대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령 카페 가서 뭘 먹으려고 할 때 '너 왜 그거 주문해. 나라면 이거 주문할 거야.'라든지, '이번 학기 너 그 수업 왜 들어? 나라면 졸업 앞두고 바쁜 시기에 그 수업 듣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러하니 너도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은근히 주입을 하는 식이다. 상대도 나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텐데, 내심 '너의 판단은 잘못되었으니 내가 말하는 대로 하라'는 메세지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오늘 공부하고 나서 저녁 해 먹을 힘이 없어 집에 가는 길에 피자를 포장주문해갈 생각이었는데, 이 친구가 공부 마치고 약속 없으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바빠서 같이 먹을 수는 없고 포장주문하는 건 같이 따라가 주겠다고 했더니 입이 나왔다. 언짢은 모양이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내가 행동해주지 않아서 맘이 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난 정말 할 일이 많았고 저녁을 가서 먹고 어쩌고 하다 보면 또 집에 두 시간은 더 지나서 가게 될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했더니 자기는 그럼 멕시코 음식을 포장하겠다고 한다.


"그래, 그럼 난 피자 포장할 테니까 넌 멕시코 음식 포장해서 가자."


그 말을 듣고 나더니 이번엔 또 내가 자기랑 같이 똑같은 음식점 가서 포장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몇 분 생각하더니 자기는 그냥 집에 가겠다고 한다 ("피자집 들러서 기다리면 시간 오래 걸릴 텐데 난 지금 당장 너무 배고파서 기다릴 힘이 없어.") 그런데 나도 이상한 오기가 있는 게, 누가 날 통제하려고 들면 딱히 큰 피해가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절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 내 인격을 무시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불안도가 높고 의존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싫어해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오늘만 해도 사실 저녁 식사 메뉴 (그것도 심지어 테이크아웃) 정하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엄연히 내가 피자 먹고 싶다고 말했음에도 다른 메뉴를 자꾸 제안하는데 기분이 점점 안 좋아졌다. 입장 바꿔서 나는 누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내가 정말 그 메뉴 먹기 싫은 게 아닌 이상 웬만하면 따라준다. 테이크아웃인데 굳이 메뉴 통일을 해야겠다는 그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끝까지 나는 내 의사를 고집했다. (그리고 난 정말 피자가 먹고 싶었다!)


그 친구는 결국 맘이 상해서 집에 돌아갔고, 나는 집에 돌아와서 피자를 맛나게 먹고 할 일을 마저 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언젠가 뇌 과학자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사람들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 자기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인식해서 더 통제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 내 친구도 어쩌면 그래서 나한테 저렇게 내 생각과 의지를 통제하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모두 엄연히 서로 다른 인격체다. 타인이 친구가 몇 명이건 어떤 형태의 우정을 나누든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고 가치관이다. 사람마다 '친구', '우정'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 '너는 그렇구나'를 하지 못하는 내 친구를 보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난 저러지 말아야지... 반성하는 주말 저녁.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혼자서 공부할 것이다. 차라리 외로운 게 낫지...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