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 정말로 치유되나요

내가 치유 받기 위해 써보는 오늘의 실험적 일기

by Yan

이 글의 제목을 뭘로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우선 공란으로 둔 채 글을 시작한다. 내게는 이미 2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한 아픈 기억이 있다. 이 일은 이후 내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이후의 유학생활 내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극복하려고 상담도 받아보고, 종교에 의지해보기도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트라우마는 극복되지 않았고 내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어디선가 들으니 글을 쓰는 것이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작은 희망이나마 걸어보고 브런치에 글을 남겨본다.


유학이나 이민으로 타국 생활을 하는 이들 사이에는 '한국인들을 조심하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돈다. 아무래도 모국어로 대화하다 보니 타국 언어에 비해 가장 속 깊은 곳 이야기도 가능하고 말이 더 잘 통하니까 외국인들에 비해 더 신뢰하기 쉽고 정 주기 쉽고, 그러다 보니 상처를 받거나 심하게는 사기와 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도 발생하기 쉬워서가 아닐까 한다. 나 또한 유학 오기 전에 주변에 유학을 다녀온 지인들로부터 한국 사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유학을 오고 첫 일 년 간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관계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일부러 한국인 친구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 타국 생활이 쉬운가? 1-2년이 지나다 보니 슬슬 아는 한국 사람들도 생기고 또 그 사람들끼리 한 다리 건너 겹쳐서 아는 지인들도 생기면서 개중에서도 좀 더 가까워지는 한국인 친구들이 생겨났다. A가 그런 한국인 절친 중 한 명이었다. A는 심지어 나와 기숙사 같은 층에 살아서 오가다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성격도 비슷해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속 얘기도 잘 털어놓고, 그 친구도 역시나 유학생활이 힘들다 보니 우리는 곧잘 밥도 같이 해서 나눠 먹고 저녁에는 산책도 같이 하면서 그날 있었던 일이나 고민들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는 그 친구 말고도 가까운 한국인 친구 B가 있었다. 그 두 사람 말고도 친구가 많았지만 나는 이 두 사람을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다. A와 B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내가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해주었고 우리 셋이 자주 밥도 먹고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두 사람이 서로 교제를 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예전만큼 그 두 사람과 자주 만나기는 힘들겠구나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소식에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A가 연애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연락을 뚝 끊은 것이다. 때마침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A는 다른 층으로 새로 배정되는 바람에 이전처럼 오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층에라도 계속 살았더라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보게 되니 이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후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일 수 있겠으나, A는 이후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정말로 증발한 것처럼 갑자기 내 인간관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생전 처음 해보는 연애가 너무 즐거웠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서로 바빠서 한 2-3일 못 보면 연락이 와서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이라도 했는데, 2-3일이 웬 말,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 한 통 없었다. 난 처음에는 서운하긴 했는데 연애 초반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고 안정기로 접어들면 그땐 연락이 오겠지. 그리고 어쩌면 공부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만 연락이 뜸한 게 아니라 교제하는 두 사람끼리도 연락이 힘든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정도로 내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정말 바쁜 모양이다 싶어서 연락 하고 싶은 걸 참다가, 그래도 밥은 먹고 살겠지 싶어서 두어 번 정도 같이 저녁 먹자고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A는 '바빠서 못 먹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친구인 B와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자 한 통 없는 것도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런 거겠거니' 했는데 (그리고 A는 평소에도 핸드폰 답이 느린 편인 데다가 본인은 핸드폰을 자주 안 들여다본다고 했다) 알고 보니 B와는 하루 종일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나도 인간인 지라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였구나 싶어서 굉장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연애 초반에 다른 친구 관계 좀 멀어지는 것은 이해하는데, 그 멀어지는 정도가 좀 극단적으로 심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나는 그 친구가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학기 중에 갑자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국에 갔나?하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알고 보니 그녀는 여전히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B와 신나게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A와 예전처럼 내게 연락을 하길 기다렸다. 연애 초반의 감정을 나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니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래도 이 정도로 극단적으로 연락 끊는 사람은 못 봤는데....'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는 더 가관이었다. 예전에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대화하기 바빴는데, 연애를 시작한 이후 마주친 그녀는 마치 1년에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사돈의 팔촌이라도 만난 것처럼 서먹서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다. 어쩌면 나 덕에 두 사람이 만난 것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를 직접 얼굴 보고 만나기도 전에 이미 내가 평소에 서로에 대한 칭찬을 상대방에게 많이 해두어서, 좋은 인상을 가진 상태로 만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내가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지나가듯 서로에 대한 칭찬도 해주었었다. 뭐 연애란 게 결국 당사자들이 잘 해야 하는 것이니 내 공이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나를 매개체로 해서 만난 것이니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그 두 사람은 내 등에 칼을 꽂았다.




나는 당시 그 두 사람이 내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 일이 엄청난 타격이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내 가족과 친구들이 다 있는 상황에서 이 일을 겪었다면 이 정도로 심하게 타격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미국, 가족과 친구들은 다 고국에 있는 상황, 내가 그나마 의지하고 가장 신뢰했던 두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기들 연애한다고 나를 멀리하니 (그것이 아무리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게는 정신적인 타격이 어마어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두 사람은 결국 나와 연이 끊겨서, 이제 우리는 캠퍼스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2년이나 지났지만 내게는 이 일이 여전히 상처이고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나는 그 두 사람을 마주치는 날에는 집에 돌아와 펑펑 울고 마음이 너무 안 좋다. 그래서 제발 안 마주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원래 파워 E였던 나는 그 일 이후 한국인들과 접촉을 줄였다. 이미 알고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과는 여전히 잘 지내지만 굳이 새로 한국인들을 만나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거나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내게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면서 다가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또 뒷통수 맞을까봐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린 가족이지' 하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남자친구가 생기니 돌변하는 사람을 겪고 나니, 인간관계가 이렇게 가볍고 허무하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한국인들을 믿지 못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나는 속상한 마음을 그 친구에게 토로했는데, 그 친구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그리고 나는 너를 마음 속으로 늘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정말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아마 내가 너에게 일상을 공유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네가 나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나 봐. 물론 나도 네 마음 이해해. 나도 예전에 나와 친하던 친구가 연애 시작하고 결혼하는 모습 지켜보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속상했었거든."


그 말은 내게 더 큰 분노와 상처를 안겼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건 누가 못하니? 그치만 네 남자친구인 B에게는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만나서 밥 먹고 놀고 했잖아. 그리고 일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네가 나를 생각했는지 어떻게 아니? 누누히 말하지만 여긴 미국, 우리는 유학생, 인간관계가 한국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작은 커뮤니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족처럼 신뢰하고 의지했던 두 사람이, 그 중에 한 명만 멀어져도 타격이 있었을 텐데 그것도 하물며 그 둘이 동시에 나와 멀어졌으니, 나는 하루 아침에 베프들이 다 사라졌던 셈이다. 그런데 그걸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그 이유도 맞는 이유들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남녀가 아니라 동성이라서, 연애가 아니라 그냥 둘이 각별히 더 친해져서 나와 멀어졌다고 해도 내가 받았을 상처는 똑같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인간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무너지면서 크게 고통 받았던 것인데, 그걸 겨우 '절친이 연애하면서 생기는 질투'로 치부하니 더 화가 났다. 게다가 너무 많이 의지했다고? 그럼 친구에게 의지하지 누구에게 의지하지? 오히려 별로 친하지 않았던 때에 한 이틀만 보지 못해도 '같이 밥 먹자, 같이 산책하자'고 연락했던 건 자기 아닌가? 나는 사실 그 친구와 친하지 않았을 당시에는 '유학생이 바쁘다 보면 2-3일 못 볼 수도 있지 뭘 저렇게 보고 싶다고 연락하나' 생각도 했었다.



두 번째 상처는 이 일로 인해 힘들었던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을 토로하면서 2차 가해로 벌어졌다. 주위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그 둘이 서로 엄청 좋아하나보네~ 연애하면 원래 초반엔 다 그렇지 뭐. Jeannie 네가 너무 유별난 거 아니야?" 그래서 나도 내게 문제가 있나 싶어서 상담까지 받았다. 그런데 전후상황을 다 얘기하고 나서 상담사 반응이 더 예상 밖이었다. 당시 나는 4-5차례 1-2주 간격으로 상담을 받았는데, 상담사가 늘 만나서 첫 인사가 '지난 주에는 그 친구 연락 안 왔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담사가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로 어느 날 갑자기 급진적으로 연락이 끊기는 건 황당한 일이라 자꾸 내게 확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어쩌면 그들도 연애하느라 이 정도로 연락을 확 끊어버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 내가 유별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들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마 내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힘들어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은 하지만, 당시에는 친구들의 반응에 서운하기도 했고 내게 정말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 두 당사자들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다 나더러 내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나는 내가 정말로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아 내가 유학생활 중에 정신적으로 너무 외로웠나보다, 내가 너무 타인 의존적이구나, 어쩌지? 속상하고 마음이 어려워서 상담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다음에도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그들에게 있었다.


일단 내 주변에 친구들 중에 연애하는 친구들 많지만 그 정도로 어느 날 갑자기 연애한다고 나머지 관계를 줄이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내가 A가 말한 대로 친구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인간이었다면 내 주위엔 싱글인 친구들만 남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친구들 중엔 연애 중인 친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결혼해서 남편과 아내가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친구들은 내게 간간히 안부를 묻고 우리는 서로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졸업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친구조차 내게 연락을 한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타인 의존적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국에서 살아도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하물며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한다면 그 관계는 사실 좀 더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차는 있겠지만 유학생들이 친구에게 의존하는 정도는 아무래도 내 나라에서 내 나라 말로 사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클 것이다. 이곳엔 가족도 반려동물도 초중고 동창들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마치 내가 다 자신에게 너무 의존해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유별나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니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가을에서였다. 2년 전 여전히 내가 그 친구와 가까웠을 당시 기숙사 주방에서 자주 마주치던 미국인 여자애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위해 본토로 떠나게 되면서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당시 나도 논문을 쓰고 있어서 바빴던 지라 이 미국인 친구와 거의 1년만에 만난 자리였다. 예전에 내가 A와 친할 때는 마침 이 미국인 친구도 우리와 생활패턴이 비슷했는지 주방에서 자주 마주쳤고 그 덕에 셋이서 같이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나와 A가 사이가 멀어지면서 우리가 밥을 먹는 일은 없어졌고 미국인 친구와는 이후 우리 둘이서 하이킹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A까지 껴서 어울린 일은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없었다.


그런데 이 미국인 친구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뜬금 없이 A에 대해 물었다.


"너 근데 A랑 지금도 연락해? 걔 어떻게 지내?"


나는 A와 어떻게 멀어졌는지 일일히 설명하기도 뭣하고 (걔 남자친구 생겨서 더 이상 나랑 안 놀아 라고 하면 얼마나 한국인을 한심하게 보겠나) 얘기하다 보면 괜히 남 흉 보는 것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 그냥 적절히 둘러대었다.


"아... 내가 요새 졸업논문 쓰느라 너무 바빠서 사실 다른 친구들을 자주 못 봐. A도 그런 것 같고..."


그런데 돌아오는 미국인 친구의 대답이 정말 충격이었다.


"아 그래? 혹시 연애해서 그런 거 아니고?"


어떻게 알았냐 물었더니, 알고 보니 A가 새로 배정 받은 방 쪽 주방(우리 기숙사는 주방에 두 개이고, 배정 받은 방에 따라 주방도 다르게 쓴다. A가 방을 새로 배정 받으면서 예전에는 나와 같은 주방을 썼었는데, 이후도 한 동안은 새로 배정 받은 방 쪽 주방 말고 이전 주방에서 계속 남자친구와 요리를 하더니, 이후 나와 마주치는 게 껄끄러웠던지 다시는 이 주방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에서 이 미국인 친구를 자주 마주치는 모양이었다.


"A가 예전엔 주방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말도 걸고 대화도 나누었는데, 요새는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옆에서 요리하는 남자친구에게만 온 신경이 쏠려있어. 그래서 좀 민망할 때가 많아. 난 뭐 A와 엄청 친했던 건 아니어서 한국인들과는 예전처럼 잘 지내나 궁금해서 너한테 물어본 거야."


그 말을 듣고 결국 사실대로 '나도 사실 A가 B와 연애하면서부터 사이가 멀어져서 지금은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그 말을 들은 그 미국인 친구가 분개하며 말했다.


"그건 서로에게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고 난 생각해. 서로가 서로에게 중독되어서 지금 서로를 고립시키는 거잖아? 연애를 하면 상대방을 통해 인간에 대해 더 알아가고 관계가 확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나머지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축소시키려는 것으로 보여. 난 그게 궁극적으로는 서로에게 독이 되는 관계라고 생각해. 난 사실 내가 미국인이라 A가 나에게 서먹하게 대하나 해서 서운했어. 그런데 이제 보니 한국인인 너에게도 그렇게 했다는 거 보니까 뭐랄까, 나 혼자만 이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싶어서 좀 위안이 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싶은 느낌이랄까?"


마지막 말이 내게 크게 와닿았다. 그래, 난 이상한 게 아니었어. 내가 느낀 감정들은 당연한 감정들이었던 거야.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하루 아침에 연애를 하면서 교류가 확 줄어들고,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더니 '네가 내게 너무 의존했던 모양이야~'하면서 나온다면, 누구라도 서운하고 화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게다가 타국에서 힘들게 유학생활하면서 겪은 일이니 상황도 특수했다. 이 모든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내가 느낀 감정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사자 A와 B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까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으니 정신병이 걸릴 것만 같았던 2년 전..... 그런데 그 미국인 친구가 (어쩌면 나보다도 더 격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들으니 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상처가 컸구나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서운하고 상처가 큰지, 그래서 트라우마로까지 남은 건지 몰랐는데 그 친구가 드디어 말로 다 정리해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내가 비정상이 아니었구나!) 그 친구 말대로 나도 위로가 되었다.




반전은 하나 더 있다. 저 미국인 친구와 대화한 이후 또 몇 달이 지나 다른 한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도 이 미국인 친구와 비슷한 말을 한 것이다. (편의상 이 한국인 친구를 C라 칭하겠다). C는 내가 A와 얼마나 친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더 이상 친하지 않다는 것도 눈치로 알고 있었지만 내게 연유를 묻지는 않았고, 나도 굳이 좋은 얘기 아니니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C와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가 나왔다. 정확히는 C가 먼저 자기 얘기를 꺼냈다.


A와 친해지고 싶어서 나름 노력을 했는데 A는 늘 남자 친구하고만 붙어다녀서, 내가 이상한 건가 했다고.... 내가 한국인 친구에게 너무 집착하나 싶었다고.... 그 친구도 결국 A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미국인 친구 말고도 나와 같은 감정을 겪은 이가 또 한 명 더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나는 사실 사람에게 크게 데인 적이 별로 없었다. '뒷통수를 맞았다'는 표현도 책에서나 읽었지 내가 겪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 A와 B는 말 그대로 뒷통수를, 그냥도 아니고 도끼로 찍어내린 격이었다. 이후 나는 한국인이 너무 무서워서, 이 일을 또 겪으면 말 그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을 멀리했다. 간혹 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을 마주쳐도 적당히 예의 갖춰 대하고 받아주지 않았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이 시점에서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90% 이상 굳힌 상태인데, 그 이유에는 사실 저 A와의 일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다시 A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인류애가 박살 나서 더 이상 못 살 것 같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엔 피눈물 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들이 내 눈에 피눈물 나게 한 것 아닌가.... 어쩌면 내가 그 둘의 만남을 주선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내가 만약 미국에 남아서 산다면 결국 또 한인 커뮤니티에서 살 수밖에 없을 텐데 (해외에서 살면 좋든 싫든 한국인들과 엮일 수밖에 없다), 또 A 같은 사람을 만나서 뒷통수를 맞는다면 그땐 정말 안 좋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든다.


이제 글로 다 썼는데, 내 마음은 치유가 될까? 모르겠다. 가끔 생각한다. '저 사람들 천벌 받지 않을까?' 자기들 행복하자고 남의 눈에, 그것도 한 때는 가까웠던 친구 눈에 이 정도로 피눈물 나게 하고 살면서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겨줬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잘 살지? 나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지금도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마음이 아픈데, 어쩜 저럴 수 있지?


A와 B에 관한 기억만 도려내서, 기억상실이 되어서 다시 그 둘을 마주치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런 감정도 들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타인의 생각은 타인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