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포스터신드롬과의 싸움
마침내 기나긴 논문 작성의 터널을 지나 그저께 predefense draft를 심사위원분들께 보냈다. 심사일로부터 2-3주 전에는 보내야 교수님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읽으실 수 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일까지는 보내야만 했다.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막판 2주 동안은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종일 책상에 붙어 있었다. 무사히 제출하고(사실 토요일 오전에 보냈으니 하루 늦긴 했지만 어쨌든), 토요일은 하루 종일 시내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 가고 싶었던 브런치 카페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관광객처럼 시내에 나가서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자그마한 키링도 나를 위한 선물로 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논문 쓰기 전까지는 발등에 떨어진 불 꺼야 해서 잠시 구석에 치워두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주말 동안 쉬면서 다시 떠올랐다. 오늘은 그 주말 동안의, 어쩌면 내 박사 과정 내내 나를 괴롭혔던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다.
임포스터 신드롬(Imposter Syndrome). 아마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현상. 끊임없이 연구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학계에서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나도 그중 하나다. 박사 4년 차 때 나름 국제학회에서 이런저런 가시적인 성과도 내고 교수님들로부터 칭찬도 들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박사 논문을 쓰는 동안 다시 재발했다.
논문 쓰기 시작했던 지난 학기 때 처음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했었다. 겨우 두 군데 썼으니 구직활동을 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이긴 한데 처음이다 보니 정말 공들여 썼다 지원서 하나당 거의 2주에서 3주를 썼으니까. 최종 면접까지 갈 뻔한 적도 있었고 서류전형에서는 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던 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곳에서도 합격하지 못했다. 구직에 너무 힘을 쓰다 보니 논문 작업을 손을 높아버리는 사태가 발생, 결국 그다음 학기인 이번 학기에는 일단 논문부터 끝내놓고 보자는 일념 하에 구직을 전혀 하지 않고 논문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 덕에 이제 2주 후면 논문 심사를 하게 된다.
나는 멀티 태스킹이 잘 안 되는 사람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보면 논문 작업하면서 구직활동도 잘만 하던데, 나는 둘 다 동시에 하는 게 안되어 결국 논문에만 집중했고, 그 결과 심사는 예정대로 진행하게 되었지만 심사 이후에 내 행로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황이다. 박사 생활 3년 차까지만 해도 미국에 정착하고 싶었는데, 논문을 쓰면서 너무 고생해서 그런가 이제는 그냥 한국에 가고 싶다. 오랜 유학생활 끝에 싱글인 유학생이 타국에서 사는 건 너무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한국 학계 상황은 막 졸업한 박사 과정생이 자리를 잡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논문 개당 점수를 매겨서 양적 평가로 하다 보니 갓 졸업한 사람으로서 여러 개의 학술 논문을 보유한 채 지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 쓰는 동안은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몰입했는데 그 성취감도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나는 또 이다음에 어쩌지? 이제 구직 어떻게 하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나아가 과연 내가 이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사실 이 걱정에 불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니고 내가 predefense draft를 심사위원들에게 보낸 직후 받은 이메일에서 비롯되었다. 두어 달 전에 북미에서 나름 유명한 학회에 초록을 냈는데 그 결과가 그날 온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떨어졌다. 뭐 학회에 초록 냈다가 떨어지는 것이야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이번 rejection은 좀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내 지도교수님이 keynote speaker (연사)로 참석하시고, 내 개인 연구 외에도 동기들과 함께 한 연구도 같이 초록을 제출했는데 그 연구는 무려 구두발표로 뽑히고 내 연구는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내 개인연구는 사실 내 졸업논문의 첫 chapter를 여는 연구를 토대로 쓴 것이었다.
사실 그간 학회에 초록을 내서 떨어져 본 게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난달에 떨어졌는데, 그것도 사실 내 분야와 좀 거리가 있는 분야였는데 전적으로 job opportunity를 위해 혹시나 하는 차원에서 낸 학회였다. 그래서 떨어져도 속상하긴 했지만 리뷰어들 평을 읽어 보니 분야가 달라서 그런지 내 연구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좀 속상하긴 해도 엄청난 타격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두 번째 rejection은 너무 타격이 크다. 난 사실 최소 포스터 발표는 붙을 줄 알았다. 졸업 식 이후에 열리는 학회이고, 본토에서 열리는 학회인 지라, 내심 졸업 후에 내 미국 마지막 학회 발표를 지도교수님이 연사로 참석하는 곳에서 동료들도 있는 곳에서 마무리하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뭐 공동연구라도 붙었으니 참석은 당위성이 있는데, 그래도 내 개인연구는 떨어졌으니..... 사실 이 학회와 하루 차이로 유럽에서 열리는 학회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 그래도 지도교수님과 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으니 난 이 미국 학회가 붙으면 유럽학회 쪽에는 미안하지만 참석 못할 거 같다고 메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유럽학회에 가야 할 판국이 되었다.
rejection 이메일에 담긴 리뷰어들의 리뷰를 사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했는데, 받은 직후에 후루룩 읽은 바로는 전반적으로 매우 혹독한 평을 받은 것 같다(그러니 떨어졌겠지). 그런데 난 마치 이게 내 졸업논문 전반에 대한 혹평으로 느껴져서 그 절망감이 더 큰 것 같다. 2주 후에 있을 심사에서도 이런 평을 받을까 봐 두렵다. 내 박사 과정 내내 했던 연구가 이런 평을 받는 것이라면, 앞으로 과연 나는 연구를 잘할 수 있을까? 5년 내내 심혈을 기울여 한 연구도 이런 결과를 낳았는데, 이제 졸업 후엔 나 혼자서 연구를 꾸려가야 하는데, 과연 내가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국은 요새 물량 위주라 미국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도 한국 오면 자리 잡기 힘들 정도라는데, 나 같은 조무래기는 대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당장 졸업 후 올해 하반기에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어제는 이 생각들에 파묻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정말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한 시간 동안 걷고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 아니야, 오히려 잘됐어. 이 평을 심사 당일 듣지 않고 지금 먼저 듣게 되었잖아? 이제 2주 동안 이 평을 잘 읽고 대비하면 돼. 심사에서 비슷한 악평을 받더라도 좀 더 잘 대답할 수 있을 거야.
- 박사논문에서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야. 앞으로가 중요해. 이번에 받은 평을 토대로 내 연구를 좀 더 보완해서 다음에 더 나은 결과를 얻으면 되지....
그러나 소용없었다. 결국 어제 하루 종일 우울한 마음에 침대에만 누워 있었고 월요일인 오늘은 일정이 있으니 꾸역꾸역 기어 나와서 연구실로 출근은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렵다. 다른 박사과정생들은 대체 어떻게 이 신드롬을 극복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