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맞는 매가 덜 아픈가

연구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란

by Yan

논문 초안을 심사위원 교수님들께 배포한 다음날 학회로부터 한 달 전에 제출한 초록이 떨어졌단 메일을 받았다. 그런데 그 초록은 내 논문 첫 장에 들어간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초록이었다. 내 논문의 포문을 여는 장인데 그 내용이 reject을 당하니 마치 내 논문 전체가 부정 당한 기분이 들었다. 세 명의 리뷰어가 코멘트를 주었는데 차마 다 읽어볼 수 없어 맨 위에 몇 줄만 읽고 덮어버렸다. 초안을 배포했으니 시원하게 휴식을 취해야 했는데 rejection 이메일을 받은 날부터 나흘째인 오늘까지 나는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기 싫다.


논문 완성하느라 미뤄두었던 학부생 수업 과제 채점도 해야 하고 저널에서 수정 권고 받은 페이퍼도 수정해서 다시 보내야 하건만, 모든 의욕을 잃은 지금 나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병에 걸렸다.


속상한 마음에 어제 지도교수님을 만나 면담했는데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교수님은 리뷰어들은 겨우 한 장 짜리 초록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니 네 논문 전체에 대한 평가라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런데 가슴이 아픈 건 아픈 것이다.


"그거 겨우 하루하고도 반나절 하는 학회잖아. 그렇게 대단한 학회가 아니야. 그리고 원래 내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리뷰를 읽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50년 넘게 교수 생활한 나 또한 지금도 리뷰어들 코멘트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학회 초록 떨어지는 것 자체도 사실 내게는 드물었던 경험이라 타격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내 연구 전반이 무의미한 연구 같고, 이제사 독한 맘 읽고 한 줄 한 줄 자세히 읽어보니 '시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그저 그렇다'는 평이어서 속상하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시도가 좋아도 평가절하 당하는 게 연구로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는데, 학계에서는 실패는 뭣도 아니고 그냥 실패일 뿐이구나. 깊은 좌절감.


이제 졸업하면 정말 나 혼자 독립적인 연구자로 서야 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연구자는 커녕 일개 대학원생보다도 못한 것 같아 괴롭다. 이럴 때 고민을 나누고 정서적인 지지를 받은 동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학과 친구들은 시기 질투가 많아서 이런 고민을 나누면 결국 내 약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번 학기 논문 쓰는 내내 혼자서 숨어서 작업했다).


그저께는 저녁거리를 사러 동네 마트로 걸어가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함께 작업하면서 서포트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게 없으니 혼자서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그러나 과연 누가 그렇게 평생 함께 서포트하면서 연구를 한단 말인가? 앞으로 평생 내가 이렇게 외롭게 연구할 수 있을까? 시기질투가 난무하고 앞에선 '좋다'고 하고도 뒤에 가서 연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동료(같지 않은 동료)들을 곁에 두고 있으니 그냥 얼른 여길 떠나서, 아니 학계를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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