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김애란, 신경숙, 박태준, 하루키의 말
1.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즘 릴케를 읽는데 문장이 치사하리만치 어렵다. (24년 6월: 지금은 중지했다)
억지 독서 중 유독 한 구절이 눈에 밟힌다.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까지 진실한 일, 중요한 일을 단 한가지도 보고, 듣고, 인식하고, 표명한 일이 없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인간은 보고, 생각하고, 쓰기 위해서 몇천 년의 시간을 가졌는데도, 그 몇천 년의 시간을 초등학교 학생이 버터를 바른 빵과 사과를 먹는 점심시간처럼 어수선하게 보내버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갖가지 발명과 진보, 문화와 종교와 철학을 가졌는데도 천박한 생활을 계속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천박한 생활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것마저도 놀라울 정도로 싫증나는 회색 커버에 싸여서 인간은 여름 휴가철을 만난 살롱의 가구처럼 변해버렸다는 사실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계가 전체가 잘못 풀이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길을 가다가 넘어진 낯선 사나이가 죽으려고 하는데, 공연히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 그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울타리를 만드는 군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역사는 군중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왔다고 해서 과거는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부터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누구나 지난 세대의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난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기 전의 일을 알고 있을 터이니 다른 과거를 갖는 타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들을 필요가 없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설득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이전에 존재한 일이 없는 역사를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의 생활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시간을 새기고 있는 시계와 같이 그 아무것과도 관계 맺어지는 일 없이 헛되이 지나가 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소녀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부인들’, ‘아이들’, ‘소년들’이라고 말하면서 그 말은 이미 오래전에 복수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무수한 개개인을 뜻하고 있음을(아무리 교양이 있는 자라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말테의 수기
1) 강한 반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 순간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니. (230610)
2) ‘생각할 수 있을까?’란 물음은 결국 생각하라는 것. 우리의 모순과 죄와 자유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 적극적으로! (230710)
3) 읽을수록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리쏭하다. 언젠가 이 글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무척 뿌듯해도 될 것 같다. (230805)
4) 다른 책을 읽다가 왜 이 글이 이리 어려운지 이유를 알았다.
제가 좋아하는 미국 소설가 바버라 킹솔버가 시집을 냈어요. 시집을 읽는데 소설가가 쓴 시집이란 편견 때문이지, 그 의미가 다 수렴되는 거예요. ‘너무나도 기발한 메타포야!’ 하는데 그 경험이 시마다 있으니까’ 이게 바로 소설가가 쓴 시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방대한 내러티브가 하나의 엔딩으로 수렴되는 소설의 구조를 바버라 킹솔버가 본의 아니게 시에도 적용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루이즈 글릭의 시는 수렴이 아니고 오히려 발산하는 느낌이 있어요. 내가 몰랐던 어디로, 안 보이는 데로 가요. 심지 네가 이걸 100퍼센트 이해를 하든 안하든 나는 내가 가야 되는 길을 간다, 네가 따라올 수 있을만큼 따라와라 이런 게 있더라고요. 김언 시인이 ‘자기의 시는 길을 찾기 위한 시가 아니라, 길을 잃기 위한 시’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게 그 뜻 같아요.
©️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릴케는 본디 시인이잖아. 애초부터 길을 잃기 위한 소설이었을지도. 완독하려나? (231204)
2. 김애란
그러나 진짜 김애란은 아직도 은행나무 아래에서 어떤 간절함의 형상으로, 고요 그 자체로 있을 것이다. 또한 글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그녀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저 간절함은 감추고 지우려고 해도 결국 그의 것이다. 허구는 진실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으므로.
“작가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데뷔도 빠르고 관심도 많 받았는데 부담되지 않냐는 거였어요. 너무 겸손해 보일까봐 거만도 떨어보고 능청스럽게 대답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격려도 비난도 어느 쪽도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 있어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줄 수 있는 건 결국 나밖에 없다.”
©️ 좋아서, 이우성 산문집
평정을 잃어갈 땐 그의 답변을 되읽는다.
다시, 격려도 비난도 어느 쪽도 나를 지켜주는 건 아니다.
3. 수중에서 점프가 가능할까?
언젠가 신경숙의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아니라면 용서하세요), 고통의 밑바닥까지 가면, 그래서 발이 바닥에 닿으며, 거기서 폴짝! 뛰어오를 수 있다고, 그러니까 피하거나 에둘러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픔을 받아들이라고, 이 말이 내겐 오래 남아 있다.
©️ 좋아서, 이우성 산문집
헛소리,
헛소리야! 고통은 신선한 공기로 차 있지 않아. 그건 익사야. 숨을 꼭꼭 막는 두터운 물. 바닥으로 떨궈지는 동안 너의 폐는 차츰 적셔지고, 차오르고, 짓눌리니, 끝내 바닥에 닿으면 발돋움할 힘은 남지 않아. 꿀렁한 수압으로 인해 납작해진 다리에 폴짝의 경쾌함은 가당치 않지. 마지막 온 힘을 짜내 짬프!
해도
풀딱, 풀렁, 풀풀
...겠지
4. 귀찮아도 씻고 자
박태준 회장을 탐험하자면 그의 목욕론에서부터 입문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적지 않은 식자들이 목욕하는 것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목욕 망국론’을 펴고 있지만, 박 회장의 논지는 다소 틀리지만 ‘목욕 흥국론’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지금까지 박 회장이 언급한 목욕론 가운데 몇 대목을 인용한다.
“섬유 수출이 한창이었던 수년 전에 우리나라 섬유제품이 많이 수출되는 어느 외국에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시간을 내어 그 도시의 한 백화점을 8층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한국산 섬유제품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격외품이나 하급품만을 파는 지하실에 내려가 보았더니 거기에 우리 제품이 제멋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점원에게 왜 우리 한국제품을 이런 지하실에서 파느냐고 물었떠니 그 아가씨는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 한국산 제품은 지하실 제품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가씨가 지적한 것을 자세히 보니 바느질한 실밥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소매가 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귀국해서 그 봉제공장 사장을 만나 ‘봉제공장 여직원들에게 목욕을 자주 하고 내의를 깨끗이 입으라 하시오. 그러면 와이셔츠는 잘 만들어질 것이오.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품질 향상의 지름길이오’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박회장은 이에 대해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이 그렇잖아요? 우리 내의 갈아입을 때 언제 갈아입소? 내의는 대게 목욕한 뒤에 갈아입지 않소. 그러나 목욕을 않고 내의를 한 1주일만 입어 봐요. 찝질한 생각이 들지요. 그 찝질한 상태로 섬세한 섬유 같은 걸 만지면, 실밥이 터졌는지 모르고 그냥 지나갑니다. 자기가 깔끔하게 하고 있으면 그거 금방 알아요. 서유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목욕하고 깨끗하게 하고 앉아서 일하며 끝손질이 잘 돼서 제품의 질이 저절로 높아져요. 또 요즘 반도체 산업을 보면 아주 정밀해져서 0.001미크론의 먼지가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머리에 흰모자를 디벼(디집어) 쓰고, 가운을 입고, 그러고서 제품을 만드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목욕을 안 해서 몸에 때가 있다면 그거 디벼 써서 뭘 해요. 내 몸이 더러운데 그런 작은 먼지가 보이겠어요? 정밀산업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제품의 질을 높여서 고도산업사회에서 선진국과 경쟁을 하려면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목욕을 해야 합니다.”
이런 논리는 거대산업체인 제철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몸가짐이 단정해지면 저절로 자기 주변을 청결히 하고 가지런히 정돈하게 마련이다. 반면에 자기 몸가짐이 불결하면 주변의 더러움에 둔감하게 되고 이러한 것이 타성이 붙으면 규율감을 상실한 인간이 되고 만다.
이것은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업자가 단정하면 공장이 청결해지고 공장이 청결하면 제품이 완전무결해진다. 반대로 자기 몸 하나도 단정하게 하지 못하는 작업자는 자기가 만지는 정밀한 기계를 하자없이 제대로 정비할 수 없고 또한 온전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법이다. 공장환경이 지저분하면 기계에 녹이 슬었거나 먼지가 앉았거나 사소한 고장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작업자들도 무관심하게 지나치게 되어 대형설비사고의 불씨가 된다. 불결한 작업자와 무질서한 공장에서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 거인의 어깨 위에서
단정함은 삶의 규율과 생산성을 촉진한다.
5. 글 쓰기 싫어서 쓰는 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 보자. 그가 말하길, 작가의 링은 오르긴 쉬우나 버티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일단 작가라는 스포츠에는 라운드나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이를테면 데뷔와 은퇴까지 고작 한 경기만 할 뿐이다. 또, 특별히 싸울 상대도 없다. 그저 링에 올라 멀뚱히 앉아 백지를 바라보는 것, 그게 전부다. 이런 규칙뿐이기에 승리 혹은 패배가 기록되질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서는 링 위에서는 적당히 누군가가 올라오면 또 적당히 누군가가 내려가는, 몹시 특별한 시합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작가라는 스포츠는 이기는 자가 아닌 머무르는 자를 위한 스포츠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밤 10시 즈음 조원들과 미디어관에서 만났다. 늦은 시간이라 왠만한 강의실은 모두 닫혀 있었다. 어디서 회의를 하나 곤란하던 중 디자이너 언니가 미대생들이 야작하는 공간이 있다며 우릴 데려갔다. “미대는 역시 야작이 많구나. 힘들겠다”라고 의례적인 말을 두었는데 언니가 “디자인 과제에 완성이 어딨니, 그저 시간을 쏟을수록 나아지는 거지. 그니까 항상 시간 부족하고. 밤 새야지, 뭐 어떡해”라고 사뭇 결연한 답을 했다. 그러네.
고백하자면 유사한 논리로 나는 글이 지긋하다. 분량을 채워도 후련히 떨쳐버릴 순 없는 미완이 지긋하고, 또 지난해. ‘완성’과 ‘작문’의 조합이 존재할까? 그저 ‘12시까지 제출하세요’라는 남의 <마감>과 ‘더 이상은 못 해먹겠다’는 나의 <체념>뿐인 거지.
그리고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만 그럴 텐데, 내가 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읽으면서 수정하는 과정이 매스꺼울 정도로 고역이다. 남의 글은 몇시간이고 읽어도 내 글은 10초도 집중하기 싫다. 실제로 마감한 내 글을 다시 읽은 적이 손가락에 꼽는다. 내가 썼으니 이미 내용을 알아서 지루하고, 거듭 읽을 정도로 좋은 글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는데, 다시 읽으라니 심통이 난다. 무엇보다 그 성가심은 적응이 없다.
짜증난다 부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