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이젠 '다가올 것'에 대해 생각할 차례.

by 개울음뱅이

12년 전에 발표된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가 새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작년 말부터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김제동이 진행하는 JTBC의 토크쇼 제목인 동시에 최근 가장 뜨거웠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8>의 메인 BGM으로 삽입됐다. 두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를 키워드로 활용한 의도는 분명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작년보다 올해 더 팍팍해져만 가는 현실에 지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판단은 정확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로 시작해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로 끝나는 1절의 가사는 괴로움을 덜고 슬픔을 달래려는 프로그램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졌다.

12년 전의 노래가 다시 쓰여야 할 만큼 지금 이곳엔 위로가 부족하다. 뒤처지면 죽는다는 절박감은 옆자리의 친구를 경쟁자로 만들었다. 서점에선 현재의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순간 낙오한다는 류의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렸다.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다행스럽게도 지금 꼭 필요한 위로의 말들이 가뭄의 단비처럼 쏟아진다. 책 속에서, 노랫말 속에서, TV 속에서. ‘걱정말아요 그대’는 슬펐던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라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런데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발견하고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다면 이제는 다가올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달콤한 위로보다 조금 시큼하겠지만, 결국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에 대해. 그러나 따뜻해진 마음과 달리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서늘하다. 오히려 점점 더 차가워져간다. 마음을 어루만져줄 위로는 넘쳐나는데, 생활을 어루만져줄 시스템은 턱없이 부족하다.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다가올 현실은 조금씩이나마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재미없지만, 꼴도 보기 싫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정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정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한국에서는 특히 심하다. 설문조사 때마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보다 낮게 나온다. 구글에서 ‘한국 정치’를 검색하면 가장 윗줄에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사진이 뜬다. 그런데 최근 며칠간 참으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정치’가 생중계됐다. 의회 다수파의 일방적인 의사 결정을 막기 위한 합법적 방해 행위, 필리버스터다. 몸싸움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대신 논리로 국민을 설득하는 정치. 누군가는 여당의 공약 목록을 읊고, 누군가는 조지오웰의 『1984』를 낭독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국회방송 채널을 시청하며 사람들은 새삼 정치가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의원들이 자리를 비웠지만 국민들은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경쟁자를 비방하며 자기를 뽑아달라고 외칠 때 외면했던 사람들도, 시스템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정치 행위엔 귀를 기울였다. 필리버스터는 다가올, 어쩌면 이미 다가온 현실에 대한 노래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위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다가올 것들에 대한 대화도 시작해야 한다. ‘걱정말아요 그대’가 엔딩곡이어서는 안 된다. 노래 말미에 등장하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하는’ 이들의 다음 노래가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