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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 꽃 Nov 16. 2024

 약속


  깊어가는 가을날, 길가 은행나무들도 곱게 물든 옷을 벗고 있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물결치는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져 노란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길을 덮는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우중충한 날씨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연출 할 수 있을까 하늘을 쳐다본다. 길거리에 예쁘게 덮인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 설치예술 같다. 쓸쓸한 거리를 마냥 홀로 걷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외가 쪽 자매들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연락했다. 동갑내기 외사촌 세 자매와 친정올케, 동생들까지 함께 여섯이 가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G읍 가우도로 숙소를 잡았다. 먼저도착한 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향감각이 서툰 내가 길을 헤맬 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았는지 멀리서 외사촌 동생이 나를 향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펜션사장이 전동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짐을 받아가고 우리는 가우도를 잇는 길게 뻗은 출렁거리는 다리 위를 걸었다.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이 마음껏 날갯짓을 하며 창공 위를 비행한다. 석양에 반짝이는 물비늘이 갈매기의 날개를 간질인다. 바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갈매기의 자유로운 생활법칙이 부럽다. 우리도 자유를 위해 생활 속의 번뇌를 바닷물 속에 던져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시간을 즐기리라. 저물어가는 시간, 서쪽 하늘에 드리운 낙조가 하루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알려준다. 잔잔한 푸른 물결위로 길게 뻗은 출렁다리를 건너 펜션에 도착해서 각자 짐을 풀었다. 

  한 폭의 동양화를 떠다 놓은 것 같은 평화로운 펜션주변은 시골길의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펜션 뒷산에서 키 작은 나무들이 바람에 수런거리며 가지를 흔들어 우리를 환영한다. 큰 나무 아래 떨어진 낙엽이 우리를 반기기 위해 종이꽃을 뿌려놓은 것 같다. 뜰 앞 화단에는 채송화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가지를 뻗혀 자기들 영토를 지키고 있다. 그 옆의 네모 상자 안에 파랗게 심어진 상추들이 고개를 내밀고 고사리 손잡고 소풍가는 유치원생 들 마냥 귀여운 모습을 싱그럽게 드러낸다. 양지바른 화단아래는 계절을 잊은 파란 쑥이 넘실대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나무꼭대기 위에서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우리를 평화로운 공간을 점거한 불청객인양 불편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작은 궁전처럼 아담한 숙소는 어떤 규율도 없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하룻밤쉼터로 안성맞춤이다.


  농사짓는 외사촌 동생의 보따리가 차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감나무 잎이 달린 단감에, 직접 뜯어 삶은 쑥으로 인절미 쑥떡을 만들고, 세발낙지가 통속에서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삶은 홍게도 한 상자 나왔다. 호텔 뷔페식이 부러울 것 없이 거나하게 먹고 바다야경을 보러 밖에 나왔다.

  어둠이 휘장처럼 드리워진 바다 위 가우도 다리위에 펼쳐진 야경은 아름다운 빛의 예술이다. 다리위에 설치된 어둠속에 아름다운 빛의 형형색깔이 빛의 축제를 연상케 한다. 다리 아래 잔잔한 바다위에 정처 없이 흐르는 바닷물은 어디서 만나서 어디에서 헤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다급함도 성냄도 흔들림도 없는 마냥 평화로운 풍경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도 마찬가지이리다. 우리들이 모였다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바닷물도 유유히 흘러 제 갈길 로 가고 있다. 


  하룻밤, 우리들은 가족을 떠나 허락받은 자유를 만끽했다. 동해안에서 펜션업을 하는 여동생은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동해안의 출렁이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혼자서 느끼는 외로움은 유배생활을 하는 죄인들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고깃배를 바라보며 지쳐가는 영혼이 하염없이 추락한 것 같은 허탈감에 빠져 힘들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번 여행이 삶의 활력소가 될 거라며 얼굴이 밝아졌다. 절제된 내면을 열고 나온 이야기보따리가 밤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다. 각자 살아온 과정과 환경은 다르지만 느끼는 감성과 생각은 같다. 저마다 과거로 돌아가 동심의 세계에 와 있지만 쌓이고 쌓인 세월의 무게는 머리카락에 흰 명주실이 듬성듬성 걸쳐있고 눈가에 잡힌 주름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0대 소녀로 만나서 함께 뛰어놀던 감성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만남을 통해 가슴에 스며드는 고독과 외로움을 떨쳐버리는 힐링 시간을 가졌다.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만남을 계기로 동기간의 우애와 신뢰를 쌓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불타는 단풍나무아래 미소 짓던 우리는 반년 후에 다시 한자리에 모일 것을 약속했다. 하루 동안 누렸던 자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막을 내렸다. 

  낙엽 지는 아름다운 가을날, 인생의 가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세월은 가도 그리움이 깃든 우리들의 만남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서로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추억이 있는 한 우리의 약속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바람타고 살며시 날아온 은행잎이 발길아래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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